강영은 시인의 風景

요즘 들어 비가 오거나 안개 끼는 날이 잦아졌다. 오늘 아침에는 마당 안까지 안개가 찾아들어 눈앞의 모든 풍경이 서서히 사라졌다. 푸르름이 번져가는 마을도 마을로 가는 길도 자취를 감추고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사람이 사는 동네라고 알려줄 뿐, 사위가 다물어 버린 듯 했다. 인간사의 불명확함에 진땀을 흘리는 것처럼 축축한 기운이 흘러들면서 안개의 입자가 된 듯 수족이 젖어든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삼키고 토해내는 안개는 신비롭다. 생각하기에 따라 낭만적이기까지 한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그 속에 묻혀 한평생 사는 일은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산과 바다를 유배시키고 마을을 사라지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떼어놓는 안개가 짙게 끼면 시야가 좁아져 주변을 분간하기 쉽지 않다. 안개 정국이며 한치 앞도 못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며, 안개의 영토 속에 들어선 인간은 누구라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될 뿐이다.

안개는 본질적으로 구름과 같다. 보는 사람에 따라 구름이 되기도 하고 안개가 되는 가변성의 차이는 물방울이 떠 있는 밑 부분이 지면과 접하고 있는가,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허황된 사람을 뜬 구름을 쫓는다, 하고 목적과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은 안개 속을 헤맨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인간사의 접면도 비슷하리라 생각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금을 긋고 땅을 넓히며 광대한 시야를 확보해 왔던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떤 수렁이 그 속에 있을지, 어떤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1100도로를 달리던 날, 순식간에 밀려든 안개에 접한 적이 있다. “1100도로는 안개가 자주 끼난 걱정 말라, 아무 일도 어실 거여” 친구가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괴물과도 같은 안개를 만나고 보니 한편 신기하고 한편 걱정되었다. 선호가 모호한 감정이 의식을 재단하며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한때의 나를 불러왔다. 꿈과 현실의 엇박자 속에 무력했던 날들, 안개 속을 헤매던 날들이 안개 속에 겹쳐졌다. 방황하던 그때, 열정과 힘을 다해 젊음이라는 혼돈을 넘지 않았던가, 적의를 드러내는 안개 속에서 안개와 같은 세월을 버티어낸 나를 격려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길의 내면 같은 숲 속으로 숲의 내면 같은 나무속으로 직진할 때가 있다
 
눈을 부릅뜨고 지나가지 않으면 커다란 입속으로 돌진하는 숲 모퉁이에서 안개가 길을 막아서는 것인데 천백 미터의 목고지에는 투명한 구면체의 입술에 피를 내준 사람이 고사목으로 서 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한다
 
고사목의 흰 뼈가 당신의 내면이라면, 당신은 어제 간 숲밖에 읽지 않았다는 말, 사라진 발목을 찾아 헤매는 살인동화만 읽었다는 말
 
살아있는 나무가 죽은 나무처럼 보이는 그 때, 피막에 흡착된 축축한 내면은 한 개의 귀로 이파리의 천리 밖을 떠돈다
 
썩은 이끼를 지닌 표고버섯처럼, 표고버섯을 건너뛴 줄무늬다람쥐처럼, 죽은 나무속에서 몸을 되찾는 일은 어제 간 숲을 다시 읽는 일, 누선의 방향만 생각하는 나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일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보이지 않고 안개만 가득한 날
 
숲의 썩은 창자 속에서 걸어 나온 이파리들의 햇살을 문 젖니는 얼마나 눈부신지 안개 낀 숲을 빠져나온 당신과 나의 뼈가 어느 방향에서 환해지는지 천백도로를 지나본 사람은 안다 
 

 -졸시 환상방황전문

환상방황(環狀彷徨)이란 안개가 심한 숲이나 들판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같은 장소에서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현상이다. 이는 똑바로 걷는다고 하면서도 한 쪽으로 쏠려서 걷기 때문에 발생한다.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만 맴돌던 한 때, 내가 걸었던 길은 환상방황이었을지 모른다. 젊음이 가진 치기, 헛된 욕망으로 기울기가 다른 걸음을 걸으면서도, 순리를 버린 행보인 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바랐는지 모른다.

전조등을 켜고 거북이걸음을 하던 자동차가 1100고지를 지날 무렵,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쳐들었다. 안개 속에서 살랑이는 나뭇잎들의 나지막한 소리, 언제 그랬냐는 듯 결박을 푸는 안개의 흰 손이 보였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는 것을, 해가 뜨거나 바람이 불기 전에는 안개가 걷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해가 비치면 곧 사라지고 말 안개인 것을,

자연의 순리는 어긋남이 없다. 그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땅의 뜻일 것이다. 불확정성, 모호함, 혼돈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안개는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한 구절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비의(比擬)적 측면에서 희망을 표상한다. 절망이나 슬픔이 그렇듯, 안개 역시 반드시 걷히고 마는 현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마당 가득 안개가 풀리는 것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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