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기억은 특별한 풍경을 채굴한다. 그 풍경은 그리움과 같은 추상의 날개를 펼치며 흘러가버린 시공을 견주어 비교하기도 한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라고 한 존 러스킨의 말처럼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풍경으로 현재의 삶을 견주는 것인지 모른다.

하효동에서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소금을 만들었다. 드럼통을 반으로 자른 것을 솥으로 삼아 그 안에 바닷물을 넣고 끓이는 방식이었다. 소금막이라는 지명이 거기에서 비롯됐다는 말과 일제시대, 공물에 충당할 해산물의 채취(採取)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우금막(牛禁幕)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은 6코스의 시작이자 끝인 쇠소깍과 연결되어 올레꾼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과 대형 선박, 어선이 드나드는 항구로 변모했지만, 내가 자라던 시절만 해도 소금막 앞 도로는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소로였다.

풀이 무성한 소로에 접어들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데, 어머니와 나는 그곳에서 보말이나 게를 잡곤 했다. 어머니는 보말을 잡기보다 인적 드문 갯바위에 올라앉아 동심초와 바위고개 같은 가곡을 목을 돋우어 부르거나 황성옛터 같은 가요를 애닯게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떤 날은 멍하니 바다만 바라볼 뿐 밀물이 밀려들어도 꼼짝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나라로 들어선 듯 대답 없는 어머니, 황혼에 빛나는 실루엣이 현실임을 이야기했지만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밀려들었을 뿐,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물녘의 그 모습을 이해하게 된 건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여자 아닌 여자로 살아갈 때쯤이었다. 아내이자 엄마로 세상의 파도를 헤치느라 정신없었지만, 문득문득 밀려드는 외로움이 무방비로 노출되던 시기였다.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젠더Gender로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내 모습이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언니가 육지로 간 이후, 어머니에겐 초등학생인 내가 마음을 터놓을 유일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건 아니었지만 해조음을 읽고 있던 그 시간이 낯선 시골 교회의 사모로 평생을 사셨던 어머니에겐 막연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소금막 바다에는 어머니와 내가 친구였던 시절이 지워지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있다. 소금막이 있었던 위치에는 소금막 지명 유래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 앞을 지날 때면 어머니와 나는 여전히 변치 않는 모습으로 조우하는 것이다.
 
 답답하실 때나 속상하실 때 기쁘실 때에도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바다로 나가셨다
 바구니 가득 캐어오던 게나 고동 같은
 그것들을 캐던 시간들만은 아닌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 하염없이 출렁이는 바다
 어머니는 그 바다 멀리 무엇을 찾고 계셨던 걸까
 밀물 들 무렵부터 나도 차츰 출렁이는 것이
 어머니의 바다가 고스란히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막막한 그리움조차 썰물처럼 빠져나간
 도시의 불빛 아래 서면
 세상은 그대로 어머니의 바다였다
 어느 외딴 섬의 무인 등대처럼
 나는 얼마나 홀로 껐다 켜지기를 반복했던가
 그때마다 뼛속 깊이 울음 우는 파장(波長)으로
 핏줄 곳곳에 물길 터주시던 어머니
 등 푸른 파도를 후려치시던 어머니, 
 급물살을 타시는데
 메마른 등의 투명한 물살 따라
 어린 멜처럼 출렁이는 내게
 어머니는 바다만 남기시고
 어디로 어디로 자맥질 하시려는가

 - 졸시 (어머니는 내게 바다를 보여주셨다)전문 -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 바닷가에 대하여에서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고 읊었다.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풍경을 기억 속에 새기는 건 자기만의 바닷가를 소유하는 일일 것이다.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소금막 바다가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 속의 한 표현대로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 수 있는 바닷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어머니가 보여주셨던 바다를 건넌다, 어머니가 지니셨던 그리움, 어머니가 느끼셨던 외로움으로 인생이라는 고해를 헤쳐 나간다. 바다를 배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운명이자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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