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바야흐로 우기(雨期)의 계절이다. 후덕한 사람의 눈물인양 마당 한구석에 있는 파초 잎에 빗방울이 가득 구른다. 처마 끝 낙숫물도 일정한 간격과 밀도를 보여주며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엊그제 물러났던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내일이면 전국적으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이상 기후가 빈번한 요즈음, 제 때 찾아든 자연의 섭리가 반갑기까지 하다.

오뉴월 장마는 음력에 의하여 유래된 말이어서 그 시기는 실상 6,7월을 가리킨다. 이때가 되면 오호츠크해 고기압과 북태평양 고기압 사이로 뚜렷한 전선이 생기는데 이동하지 않고 머무는 성질을 가진 이 전선과 수렴대가 우기를 몰고 오기 때문에 이를 장마전선이라고 부른다. 장마전선이 생기면 삶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변덕이 심한 장마전선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칠지, 총을 들고 싸우는 전쟁은 아니지만 내리는 비 속에 잠겨 있는 일상과의 전투가 힘겨워진다.

식중독을 비롯해 여러 가지 질병이 발생하고 저기압으로 인하여 관절 통증이 심해진다. 일조량이 감소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졸리거나 기분이 저하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장마우울증으로 이는 몸속에 멜라토닌의 분비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멜라토닌은 밤에 집중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인데 우리 몸이 햇빛에 노출되면 멜라토닌 분비가 억제되고, 기분을 좋게 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활성화된다. 퀸즐랜드 대학교 나오미 로거스 박사는 시드니 모닝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아침에 햇빛을 보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낮 모드(mode)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신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며 세로토닌 대신 멜라토닌이 계속해서 분비돼 하루 종일 피곤하고 늘어지게 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규칙적인 빗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가 내릴 때 지붕이나 땅바닥, 우산에 똑똑 부딪히며 나는 규칙적인 소리를 이른바 핑크 노이즈(Pink noise)라고 하는데 핑크 노이즈는 백색 소음(White noise)처럼 불필요한 뇌의 활동을 줄이기 때문에 수면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저음과 중음대의 음이 고음보다 높은 핑크 노이즈는 백색 소음보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비오는 날 맞선이나 소개팅을 하면 맑은 날보다 성공률이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으며 비오는 날에는 저항력이 약해져 이별을 통보받아도 화가 덜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오는 날의 미각은 파전과 부침개를 혀끝에 올린다. 기름에서 지글대는 소리가 빗소리와 비슷하고, 기름 냄새가 멀리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코드를 살펴보면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 있다. 탄수화물(전분)은 인체에 들어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당으로 바뀌어, 이 당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저하시키는 작용을 조상들은 삶속에서 터득한 것이다.

이처럼 장마가 끼치는 양태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심리는 빗속에 젖어든 초목처럼 우울과 낭만이 어울려 빚어낸다. 비속에 잠겨 있는 만상의 모습과 하나된 것처럼 마음이 젖어오고 몸 밖의 아닌 몸 안의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크고 작은 빗소리는 다분히 몽환적이어서 비현실적 공간으로 쉽게 초대한다. 눈물 너머의 풍경처럼 흐릿하게 경계를 지워가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들리는 것은 빗소리며 그 속에 잠겨 있는 또 다른 내가 기억 속을 왕래한다. 고달픔과 외로움을 달래주던 건 우산 위로 흐르던 눈물 같은 빗줄기였기 때문이었을까, 투명한 비닐우산을 받쳐 들고 구시가지가 되어버린 중앙로를 쏘다니던 소녀 시절, 수채화처럼 번져가던 마음의 풍경이 아련해진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웅덩이 위에 고이는 가벼움으로
 누군가에게 물결 져 갈 때
 바람에 부딪혀
 동그란 평온이 흔들리고
 비스듬히 꽂힐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렇게 부딪히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를 만나고 싶다.
 창문을 두들기는 간절함으로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를 때
 바람에 흩날려
 흐르던 노래가 지워지고
 희미하게 얼룩질지 모르겠지만
 한순간, 그렇게 젖어들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가두거나 가볍게 굴릴 수 없는
 투명한 세계나무의 나이테처럼
 옹이 지거나
 수갑 채우지는 않겠다.
 컵이나 주전자에
 자유롭게 담기는 사유의 기쁨으로
 빗방울 같은 내가
 빗방울 같은 너에게
 다만, 그렇게 담겨지고 싶다.
 -졸시 (비 오는 날의 연가(戀歌) 전문 

 
 장마의 계절이다. 기나긴 비의 행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지만, 빗방울처럼 투명한 마음으로 지루한 장마를 이겨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설령 견딜 수 없는 아픔일지라도 그 아픔에 스미거나 젖어들면서, 그러나 온전히 부서지지 않는 빗방울처럼 축축한 계절을 의장(擬裝)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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