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옆방에서
 누군가 부른다 마치 나인 것처럼
 나는 서둘러 문을 연다
 이쪽은 어두운데
 그곳은 밝게 햇살이 비치고 있어
 지금 막 누군가 떠나간 참인 듯
 그림자가 슬쩍 눈을 스친다
 하나 내가 쫓으면 이미 아무도 없고
 별다를 것 없는 해질녘이 된다
 꽃병엔 먼지가 쌓였다
 창문을 여니 하늘이 밝은데 거기서도
 누군가 부른다 마치 나인 것처럼...
 -다나카와 슌타로의 <해질녘>전문

 

해거름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을 뜻하는 용어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분해보면, 해넘이보다 조금 앞선 때를 가리킨다. 해넘이는 해가 서쪽 산마루나 지평선 뒤로 넘어가거나 수평선 아래로 잠기는 때를 말한다. 아름다운 해넘이를 볼 수 있는 해거름을 특성화 한 곳이 있다. 도시와 시골의 교류를 위한 연계 프로그램에서 태동한 것이지만 한경면 판포리, 신창리, 금등리, 두모리 등 4개 권역을 하나로 묶은 해거름마을은 바닷가의 풍경이 아름답고 제주 전통 농촌 풍경이 잘 보존된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해 너머 머물고 싶은 곳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관광객들의 호감을 사는 한편, 제주의 변두리에 속하기 때문에 제주의 농촌 체험을 하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해거름 마을의 관문인 판포리 바다는 제주의 숨은 비경이라 할 수 있다. 일몰 시간이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황홀경을 보러 종종 해거름 전망대로 향하던 때가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빛을 벗 삼아 걷다보면 멀리 보이는 하수종말처리장의 초록 기와가 녹색비단구렁이처럼 빛나는 그때, 바다 저 멀리 불사조 같이 날개를 펴는 잔광이 구름 위까지 솟구친다. 장엄하게 불타는 바다 위를 떠가는 조각배, 일몰을 향해 낚싯대를 던지는 사람의 실루엣이 환상처럼 저무는 풍경에 방점을 찍는다. 전망대 이층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보랏빛 여명이 마음에 잔물결을 썼다 지운다. 잿더미가 되기 위해 하늘도 바다도 마지막 힘을 다하는 시간, 설핏 기운 수평선이 잉겅불처럼 박혀든다. 동공이 파 먹힌 새처럼 두 눈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풍경을 아로 새긴다.

태양이 슬리퍼를 벗어던진 판포리서부터 검은 길이다 질척해진 길이 두 눈을 뽑아 해변으로 던진다 동공이 파 먹힌 새 한 마리 수평선에 얹힌다

스쳐지나간 날개를 말하는 것은 물빛 젖은 바람, 물색을 본뜬 서풍에 밀려 바다의 밑줄 같은 배 두 척이 지워진다 

절실하게 그립지만 절박하게 두려운 것은 마음의 벼랑일까

너를 사랑한 일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림이었으면, 사진이었으면, 필기용 책상을 가진 물결 앞에서 낭떠러지를 말하고 나니

어떤 그리움도 죽음마저도 발가락이 식별되지 않는 맨발이어서 한 폭의 바다를 불사른 어둠은 이제 문둥이다

낚싯줄을 드리운 방향에서 돋아나는 일몰을 몰고 너에게 도착한다

손바닥에 금침을 품은 나는 저 물결에 얼룩진 발자국을 내줘도 좋은 것이다 변함없이 친밀한 저녁이 되기 위하여 갯바위에 숨은 한 마리 숭어여도 되는 것이다

귀밑머리 촉촉이 젖는 거기서부터 달빛이 수를 놓는 월령리다
- 졸시 <해거름 전망대에서> 전문

해거름은 해와 거르다가 결합된 말이라고 한다. 거르다는 뭔가를 차례대로 해가다가 중간에 어느 자리를 빼고 넘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거름은 하루가 건너뛰듯 지나가 버린 것을 뜻한다. 그래서일까, 해거름 전망대의 난간에 서면 하루가 온전히 노을에 물들어 시간이 정지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곧 일몰에 잠기게 된다. 어느덧 해는 장밋빛 서녘으로 사라지고 그 순간마저 꿈으로 여겨지는 그 때, 어느덧 내 인생도 세월을 건너뛰었음을 실감한다. 마음속에 잠겨있는 어둑한 풍경들, 물 위를 튀어 오르는 숭어가 아니라 갯바위에 숨은 숭어가 되고 싶었던 걸까,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나를 그리워하는 또 다른 내가 술래처럼 거기 서 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을 붙잡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때가 해거름이다. 마음의 낭떠러지인 포기와 좌절, 마음의 벼랑인 소외와 결핍이 아무리 등을 떠밀어도 하던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인 것이다. 비로소 어떤 그리움도 죽음마저도 발가락이 식별되지 않는 맨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해거름 전망대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손바닥 선인장의 자생지인 월령리가 지척이다. 선인장 잎사귀마다 마악 돋기 시작한 달빛이 스며든다. 저, 달빛 바늘로 내 인생의 가시들을 빼낼 수 있다면, 어떠한 해거름도 두렵지 않으리라, 땅거미가 몰려온다 해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전망할 수 있으리라. 눈물을 아는 것은 초저녁 별 뿐이리라. 어둡지만 어둡지만은 않은 길이 해 너머 머물고 싶은 곳처럼 나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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