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도를 육박하는 폭염이 지상을 달구는 동안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행을 드러낸다. 가을이 들었음을 알리는 입추와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처서도 지났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이 있듯, 처서가 지나면서 남몰래 애태우는 사랑처럼 하늘이 조금씩 깊어져 가고, 높이 떠 있는 뭉게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볕도 어쩐지 빛이 바랜 듯 여겨진다. 불에 타지 않는 은박지처럼, 쿠킹 호일처럼, 구겨질 것 같은 햇빛의 질감이 따갑지만 따갑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던 풀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제초기 돌리는 소리가 요란해진다. 길가나 밭두렁의 풀을 깎거나 추석이 가까운 절기여서 부지런한 사람들은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는 등, 이승악 초입에 있는 마을의 공동묘지도 얼기설기 엮인 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여름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풀만큼 깊어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의 부인들과 선비들은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음지(陰地)에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 )를 이 무렵에 했다고 하니, 처서는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절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언니, 여긴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 불멘, 오늘 새벽에 문 닫고 잤다니까. 동생의 전화가 아니더라도 바람결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고향에서의 삶은 아침저녁 마당에 심은 나무와 화초에 물주는 일이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고적하다. 유난히 메말랐던 올 여름, 어느 때보다 숨을 헐떡이는 그것들이 안쓰러워, 다친 다리를 끌며 마당 구석구석까지 헤매는 일이 다반사였다.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까지, 자연의 은덕에 힘입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그것들 앞에 서면 신의 손길을 감지하기도 전에, 저절로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뜰에서 보내는 일이 가장 살뜰한 일이고 보면, 장마철 어디라 할 것 없이 눈에 띄던 민달팽이며, 테라스 아래에서 끝없이 기어 나오는 개미들 하며 제 집인 양 드나드는 집거미들까지, 하잘 것 없는 생명이라 여겼던 미물들조차 반가운 벗이 되기 마련이다. 내 목숨과 저들의 목숨이 다름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잠자리야,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시들어가는 풀끝에 머물다가는 잠자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 반짝, 문자 메시지가 뜬다 이 무더운 여름 어떻게 지내세요? 이(李) 모 시인의 안부문자다. 초록이 무성하다고 여름의 깊이를 전하려는데 서툰 손가락이 초촉이 무성하다고 답신한다. 잠시 후, 파안대소의 음성이 휴대폰을 타고 들려온다, 역시 언니는 시인이야, 초촉이 무성하다니..... 풀이 그렇게 뾰족하게 자랐어? 급소에 질린 듯 호젓한 순간의 외로움이 들통 난다.
 
 여름 뜰에서 안부메시지를 받는다
 초록이 무성하다고 답장 쓰려는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초촉이라 치고 만다
 초촉이 무성하다 했으니 시퍼렇게 돋는 풀을
 시인인 그대는 초록 잉크 담뿍 든 펜촉으로 읽었으려나
 날카로운 풀끝에 베인 손가락은 초촉焦觸*의 칼보다
 비명을 질러대는 방패에 가까운데
 바지랑대 끝에 앉았다 가는 잠자리 한 마리,
 박명의 펜촉이 건너오고 건너가는 서쪽이
 핏물 흐르는 벽이다
 공중을 방패삼은 이즈음의 나에겐
 허공을 건너오는 모든 문장이 풀잎이어서
 단검 같이 돋아나는 달빛을 공중에 적어둘 뿐
 족집게로 올올이 뽑아낸 눈썹 같은 구절을
 받아 적을 손톱이 없다
 어두워가는 풀밭도 그리움을 주군으로 둔 나도
 몸속에 잉크를 담지 않으면 쓸모없는 펜대
 그대의 안부가 내려앉은 허공의 깊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번지는 노을마저 그대에게 닿는 펜촉이어서
 저, 풀의 펜촉, 다다른 자리가 적벽이다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없는 초촉이 무성하니
 허공을 베지 않으면 닿지 못하는 적벽의 서쪽,
 거기가 지우고 다시 쓰는 이 여름의
 마지막 지상이다.
 -졸시 (여름의 깊이) 전문

초촉이 가진 중의성, 풀로 된 펜을 연상시키는 기표(記標)와 조조의 부하 장수인 초촉이라는 기의(記意)를 써서,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간 허공의 깊이를, 붉은 놀 스러지는 저물녘의 하늘을, 목숨 걸고 써야할 시인의 숙명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워가는 풀밭도 그리움을 주군으로 둔 나도/ 몸속에 잉크를 담지 않으면 쓸모없는 펜대가 아니겠는가? 여름의 막바지이자 가을의 초입인 처서 지나 문득, 시인의 길을 생각해본다. 폭군처럼 뜨거웠던 여름날의 무기력함에 벗어날 때쯤 가을이 와 있지 않을까, 잘 마른 풀처럼 향기로운 가을 속에서 잘 익은 열매들을 알차게 수확할 수 있기를, 알알이 영근 열매 속에 폭염을 견뎌낸 인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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