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의 불로초 뱃길따라<1>

진시황, 불로초 캐러 제주도에 사신 파견서귀포 지명유래와 정방폭포의 서불(시)과차서귀포라는 지명유래는 중국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초를 캐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 서쪽으로 돌아간 서복의 전설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본지는 교육학 박사인 이형석 소장의 기고로 전설로만 내려오고 있는 ‘서복과 불로초’에 관한 내용을 보다 실증적이고 역사 문헌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6회에 걸쳐 연재한다.1972년 연세대 박영준교수가 편찬한 「한국의 전설」 제2권에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포읍(현 서귀포시) 서귀리(西歸里) 정방폭포의 바위벽에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에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서시(불)와 불사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중국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으나 그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선술(仙術)을 닦는 방사(方士) 서시는 ‘폐하 소신이 알기로는 바다 건너 조선국 삼신산(三神山)에서 나는 불로초(不老草)를 복용하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옵니다’고 진언했다.이에 진시황의 승락을 받은 뒤, 동남동녀 각각 오백명을 뽑아 배에 나누어 싣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출발, 제주도의 조천포(朝天浦)에 닿았다. 동남동녀들은 뿔뿔이 헤어져 한라산(영주산)을 비롯한 제주일대에서 불로초를 찾다가 신선의 열매라고 하는 ‘암고란’을 가져왔다.‘시러미’라고도 부르는 암고란(岩高蘭)은 여러 질병에 특효가 있는 것은 것은 사실이지만 불로장생의 영약은 아니었다. 서복(徐福)은 서귀포(西歸浦)의 정방폭포 바위벽에 ‘서시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글자를 새기고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또 일중당에서 발행한 「국사대사전」(이홍직편) ‘정방폭포’항에 ‘제주도 서귀포 동쪽에 있는 폭포.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여 동방 멀리 이곳에 사신을 보냈다는 전설도 있는 웅장한 폭포로 제주 명승 ‘영주십경’의 하나이다’고 기록되어 있다.여기에서 서시는 누구인가? 학원사에서 1966년 발간한 「세계백과사전」에 ‘그는 중국 진나라의 방사로 이름은 서복(徐福:「史記」에는 서불·서시-‘徐市’의 ‘市’자는 본래 ‘불’자이나 ‘市’자와 혼동하여 서불·서시로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제가 불로·불사의 선약을 구함에 서복은 해중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고 선인이 여기에서 선약을 만든다고 상서하니 시황이 동남·동녀 5백쌍을 내어 선약을 구하게 하여 서복은 이들을 데리고서는 시황에게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가 구마노우라(態野浦)에 상륙하여 왜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같은 책에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화상문자(畵像文字)의 하나로,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아리에 있는 바위에 새긴 글자로, 전설에는 진시황이 서불과 5백명의 동남동녀를 삼신산에 불로초를 구하러 보내었는데 이들이 이곳에 와서 새긴 동양 최고의 화상문자라 한다. 그러나 학자간에는 이견이 있다’고 하였다.1985년 한국관광공사에서 발간한 「한국관광자원총람」에도 ‘중국 진시황의 사자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에 동남동녀 5백명을 거느리고 상륙하였다가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석벽에 '서불과처(徐市過處)'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계속><사진설명-맨위 부터>...동양 유일의 해안폭포인 정방폭포. 폭포 절벽에는 중국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이 한라산(영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 놓은 서불과차란 글자가 있으며 서귀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한라산(영주산)의 명물 이끼폭포. 불로초가 자랄듯한 분위기다....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의 상주리 석각(경남기념물 제6호). 일명 '서시과차'라 불리는 그림문자(가로 7m, 세로 4m의 평범한 바위위에 가로 1m, 세로 50cm 넓이로 새겨져 있다.)이형석/백두문화연구소장.교육학박사제254호(2001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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