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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의 風景> 으악새
강영은 | 승인 2016.10.13 09:25

태풍 차바가 가을을 흔들며 지나갔다. 마당으로 밀려든 나뭇잎이며 부러진 나뭇가지들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는데 꼬리를 감추었던 가을이 슬그머니 찾아와 계절이 깊어 감을 알린다. 바람이 한층 소슬해지고 저 혼자 자란 소국의 무리가 노랗게 돌담가를 물들인다. 억새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이 관광객의 입에서 하얗게 핀다. 여기저기 은빛 억새들이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마음이 먼저 가을의 절정에 들어선다.

억새가 군락을 이룬 산굼부리, 몇 년 전 보았던 억새들의 춤사위가 눈앞에 흑백의 수채화를 이룬다. 오름의 능선마다 피어나는 억새의 행렬도 멋있었지만 은빛 물결을 이룬 초원의 풍경 앞에서 찬란하게 돋아나는 슬픔을 느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바람밖에 없는 쓸쓸한 들판에서 저 혼자 춤을 추는 억새의 향연이 이 땅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고 느꼈던 것은 누가 심지 않아도 절로 나고 자라는 태생적인 슬픔을 막연히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억새가 소슬바람에 스치는 소리는 정말로 스산하고 처량하다. 슬픔의 정한에 다다르는 소리다.

언제부턴가,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이 18번 가을 노래가 되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으악새’가 어떤 새인지 궁금했다. ‘으악새’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한편, ‘으악새’가 ‘억새’를 부를 때 쓰는 경기방언임을 알고 무릎을 쳤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뒷동산에 올라가 보니 멀리서 ‘으악, 으악’ 우는 새의 소리가 들려 붙인 이름으로 설명한다. 노래의 배경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았다. ‘으악새’를 새의 이름이 아닌 풀의 이름으로 해석했을 때 이 노래는 시적(詩的)으로 빛을 발한다. 억새가 흔들릴 때 바람에 부딪히며 마찰음을 내는데 그것을 울음소리로 표현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비유적인 면에서도 풀을 새처럼 멋지게 표현한 것이 된다. 억새의 우는 소리라 했든, 으악, 하고 우는 새소리라 했든, 가을의 애상(哀想)과 정서를 나타내는 데 손색이 없다고 느껴진다.

 으악새 슬피 우는, 종결형의 가을이 매번 찾아왔으므로 나는 으악새가 호사도요, 흑꼬리도요, 알락꼬리마도요 같은, 울음 끝이 긴 새인 줄만 알았다 한라산의 능선 길, 하얀 뼈마디 숨겨진 길을 걸으며 억새의 울음소리를 잠시 들은 적은 있지만 내 몸의 깃털들 빠져나가 바람에 나부끼는 유목의 가을, 능선의 목울대를 조율하는 새를 보았다 

 生에 더 오를 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농약 탄 막걸리를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는 작은 외삼촌, 한라산 중턱에 무덤 한 채 세운 그를 만나러 앞 오름 지나던 그날, 차창 너머 햇빛에 머리 푼 으악새, 출렁이는 몸짓이 뼈만 남은 삼촌의 손가락 같았다 어깨 들썩이며 우는 삼촌의 아으, 희디 흰 손가락, 그날 이후 손가락만 남아 손가락이 입이 된 새를 사랑하게 되었다  

 으악새 둥지를 내 몸에 들였다

- 졸시 <으악새> 전문

산굼부리의 정상을 향해 걸어가던 그날, 나는 으악새를 막 날아가려는 어느 영혼의 깃털로 여겨졌다. 길 양옆을 장식하는 억새꽃들은 바람에 흐느끼는 새였으면 내 목울대에서 소리 없이 우는 새였으며 쉽게 끝나지 않을 슬픔을 조율하는 누군가의 영혼처럼 느껴졌다. 부르면서 가을마다 찾아드는 도요새처럼 철새의 외로움에 깃들곤 했다.

억새도 나도 섬 주위를 맴도는 파도를 닮았다. 은빛물결인가 싶더니 어느새 금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억새는 하루 세 번 변하는 승경(勝景)으로 하여 별명도 세 가지다. 아침햇살에 빛날 때면 은억새, 지는 해를 받아 금빛으로 출렁일 때는 금억새, 달빛을 받으면 꽃이 솜털같다 하여 솜억새로 이름이 바꿔진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강풍에 드러누운 나무들을 다시 심고 말끔해진 마당을 보니, 가을이 한층 깊어진 무릎으로 열반에 들 채비를 서두른다. 제주의 진정한 가을 풍경은 억새에서 정점을 찍는 것은 아닌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억새를 보러 가야겠다. 한라산 능선 길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 억새꽃으로 환생하고 있을지 모른다. 죽은 자의 뼈마디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억새를 보며 가슴에 담아두었던 그 이름들을 소리 내어 불러 봐도 좋으리라.

 

강영은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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