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아름다운 인연

아무도 없는 오전 시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저예요, 선생님. 신영이예요. 선생님 제자 신영이요”나직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신영이었다. 귀농관련 잡지에 실린 내 책에 관한 기사를 읽고서 전화번호를 수소문해서 걸었단다. 신영이를 만난 건 내가 대학 4학년때 교생실습나간 서울의 한 여고에서였다. 그때 내나이 스물 셋, 먹고 살기 위해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거나에 도무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 시절,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고 신청한 교직과목이었지만 나는 죽어도 교직은 선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배치된 신영이네 반 아이들과 4주동안 같이 지내면서 아무런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편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교직자는 이래야 할 것이다’혹은 ‘학생에게는 이렇게 지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겐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적이 떨어졌다며 울면서 상담을 해오는 학생에게 ‘성적이 떨어졌다고 네 인생이 망가지기라도 한단 말이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고,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오는 학생에게는 ‘너 아니라도 그 총각 선생님 짝사랑할 얘들 많으니까 너는 차라리 너와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는게 좋겠다’고 대꾸해주기 일쑤였으니 나는 참으로 한심한 교생이었다. 실습 마직막날, 마지막 수업과 함께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아이들이 내게 한아름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금박지와 은박지로 접은 천마리의 학과 함께 카드를 넣어 만든 유리상자였다. 50여명이 스무개씩 접어서 만든 내 선물은 그날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동료 교생들이 가방이 찢어지도록 받은 스타킹이나 초콜릿이나 인형같은 선물에는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고 지금도 나는 그 종이학을 소중하게 보관해 오고 있다. 그 빛나는 선물 준비를 주도했던 아이가 바로 반장이었던 신영이었다. 신영이는 봄 소풍 때도 몇 몇 아이가 무대를 뒤흔들고 들어가는 다른 반과는 달리 학급 전체가 참여할 수 있는 연극을 준비하는가 하면, 그때로서는 흔치 않았던 학급 티셔츠를 만들어 다함께 입자고 제안했던,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펴던 아이었다. 어쨌거나 신영이를 비롯한 몇 명의 아이들은 내 졸업식과 결혼식에 하객이 되어 내 인생의 중요한 의식때마다 증인이 되어주었다. 신영이는 내가 결혼한 후에는 내 신혼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내 남편을 형부라고 부르질 않나, 남편이 친구들과 계획한 지리산 종주에 끼여들지를 않나 몇년동안 꼭 내 친동생처럼 지냈었다. 그러다가 연락이 끊긴지 11년, 그 신영이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나와 별로 나이차가 없는 신영이도 이미 ‘아줌마’가 되었으니 그 세월의 깊이와 넓이를 어찌 다 말로 하리요.신영이는 최근 귀농교육까지 받았단다. 자기는 농사를 짓고 싶은데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남편이 시기를 좀 뒤로 미루자고 해서 생각중이란다. 서울 근교로 이사가서 전원생활과 함께 직장생활을 겸해보는게 어떠냐는 남편에게 신영이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농부가 아니다. 나는 진짜 농사를 짓고 싶다’며 아예 고민할 시간을 더 가져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몇년 전 농부가 되고 싶은 꿈을 불태우던 내 남편과 너무 닮은 꼴이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 사는 길은 오래 생각하던 대로 열리게 마련인 법.어쩌면 몇 년 뒤에는 신영이도 내 곁에 와서 농사를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곁이 아니면 어떤가. 이땅 어디에라도 신영이가 뿌린 씨앗에서는 신영이처럼 반듯하고 알찬 곡식이 여물 것을 나는 믿는다.조선희/남군 표선면 토산리 제254호(2001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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