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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의 風景] 판포
서귀포신문 | 승인 2016.10.27 09:53

10월이 지나면서 시베리아에서 태동한 계절풍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숨죽인 갈매기 떼가 종일토록 바람의 꼬리만 따라가는 그런 날, 마을과 포구는 들로크로와의 화풍처럼 음산해진다. 거칠고 힘찬 터치로 역동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들로크로와의 붓처럼 바람은 종일 음울하게 마을을 채색한다. 허공의 현악기처럼 전선줄이 울고, 바람에 밀린 나룻배처럼 사람의 등이 길 위를 둥둥 떠간다. 판포리의 풍경은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바람과 함께 늦가을을 시작한다. 낮게 웅크린 돌집 안에서 심금(心琴)을 건드리는 바람소리를 듣던 그 가을의 저녁, 귀양살이처럼 쓸쓸한 소회에 잠겼던 그때의 풍경을 접사(接寫)해본다.

판포리는 귀향(歸鄕)하면서 처음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엄밀히 말하면, 판포리 중에서도 엄수개(포구)가 있는 바닷가 동네, 판포 포구가 있는 신명동이다.『판포리지』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한경면 저지 지경에 살던 변엄수라는 사람이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 해안가 용천수를 길러 왔다가 그만 물허벅을 깨뜨리는 바람에 아예 웃드르에선 못살겠다고 눌러앉게 된 게 설촌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용천수가 솟아나오는 엄수개가 자랑스럽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듣거나 가본 적 없는 고장이었다. 제주도 밖에서 보면, 제주도 전제가 고향이기에, 제주도 어느 곳에 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 나는 그곳에 짐을 풀었다. 관광지로 변해버린 낯선 고향보다 고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낯선 동네가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몰랐다.

나지막한 돌담과 올망졸망 섞여 있는 올레 길, 정체성을 잃어버린 제주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감동이 그곳에 있었다. 바다 안개가 밀려오는 새벽녘과 해거름에 불타는 바다, 돌담에 스며드는 빗소리, 윗마을로 가면 상동, 중동 마을이 있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 무너진 기와집, 숨은 보물을 찾듯 마을의 빈 집을 찾아 비어있는 시간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남동쪽 머루왓과 오름 동쪽을 돌아 한이왓 부근 들판을 가로질러 옆 마을로 가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사라진 길을 못 찾아 해매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저 홀로 익은 산딸기를 배부르게 따 먹었던 기억들, 풍경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잠깐 동안이라 해도 내면에서 황홀한 평화와 일체감을 느낀다고 했던가. 널개 오름을 가운데 두고 바다와 오름, 들판과 동산들이 오묘한 조화를 마을 풍경만큼이나 그 곳에 살았던 2년의 기간은 나는 내 안의 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곳에서 상재한 두 권의 시집이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은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풍경들이 영혼을 살찌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판포리의 지명은 포구가 중심축을 이룬다. 상동 지역이 이물이고 가마귀 동산을 고물 삼아 미밋에 뱃대를 꽂았다는 이야기에서 보듯, 포구는 배의 모습을 한 채 막 바다로 떠나갈 듯 출렁거린다. 밤마다 낚시꾼들이 던지는 불빛이 별빛처럼 포구 여기저기를 수놓는다. 판포의 일몰은 비경 중의 비경이다. 고독한 부화를 하는 태양의 붉은 빛은 아름답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판포의 정점은 바람이다. 기슭까지 하얗게 일어서는 파도와 파도를 몰고 오는 바람의 포효다. 판포에 산다는 것은 바람의 옷을 입고 파도를 건너는 일, 그 기백이 진정한 아름다움이기에 내 기억의 선착장에 그리운 판포가 있다. 어느 쪽으로 고개 돌려도 긴 문장이 따라오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있다
 
 

판포의 노을

한낮인데도 뱀 눈깔이 돋았다. 작대기를 든 손목에는 들고양이가 울었다. 갈매기가 물똥을 갈기고 가는 집에는 폐허가 담쟁이를 키웠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웃이 있었다 하나 늦게 차린 밥상이 식어갔다. 등 뒤에는 바람과 햇살보다 더 빨리 싹을 틔우는 고요가 있었다.
 일주도로를 달려온 유채꽃무더기가 700번 버스에 올라타곤 했다. 이국에서 밀려 온 수평선이 버스를 따라 달렸다.
 저녁마다 수평선이 객혈을 했다. 헤어진 애인에게 보내는 연서처럼 한 발짝 먼저 도착한 별빛이 눈시울을 붉혔다.
 집채만 한 고요가 파도소리를 내려놓으면 사내들이 어둠을 뒤집었다. 칸델라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미늘에 걸린 고요가 반짝였다.
 오름의 허리께에서 보면 흰 갈기 날리는 서쪽 포구가 바람코지였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바람의 옷을 입고 파도를 건넜다.
 바람이 벗어 놓은 마당은 표백제처럼 희었다. 쑥부쟁이가 고개 드는 마당구석에선 검은 잠수복이 물때를 기다리며 늙어갔다.
 별빛이 샘물을 들이붓는 새벽녘에는 해류를 타고 온 오대양이 드무에 든 것처럼 고즈넉했다. 어느 쪽으로 고개 돌려도 긴 문장이 뒤따라 왔다.
 -졸시 (판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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