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의 불로초 뱃길따라<2>

서씨가 서쪽으로 돌아간 곳 ‘서귀포’[서귀포 지명유래와 정방폭포의 서불(시)과차]1983년 중앙도서관에서 발행한 「한국의 여로」 ‘제주도편’에 김광협(金光協)은 ‘서귀포’의 지명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이란 자가 불로의 영약을 구하러 제주에 왔다가 한라산 백록담 주변에 자생하는 ‘시로미’(방언 암고란)라는 약초를 채집하고 떠날 즈음 이 고장의 미녀에 홀닥 반해 버렸다.한참 체재하다 이곳 정방폭포 암벽에 서씨과차(徐氏過此)’라는 네글자를 새겨놓고 감으로써 ‘서씨가 서쪽인 중국으로 돌아간 곳’이라 해서 ‘서귀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서귀포의 명칭은 서귀포시 서귀동에서 비롯되었는데 1984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 제주편에 ‘서귀동은 본래 정의군 우면지역으로서 서귀 ‘서귀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귀리라 하여 제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남제주군 서귀면(읍)에 편입되고 1981년 서귀포시가 되는 동시에 서귀동을 여럿으로 갈라서 일부는 보목동과 토평동, 동홍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송산동으로, 일부는 정방동, 일부는 중앙동으로 했고 서홍동 일부를 합하여 천지동으로 해서 4개 동회로 갈라짐’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1486년 조선 성종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정의현’편에 ‘서귀포방호소(防護所)를 비롯, 서귀포방호소성, 서귀포수전소(水戰所)’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서귀포’가 표기되어 있다.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나 「고려사」지리지에 ‘서귀포’라는 땅이름은 기록되어 있지않고 단지 「고려사」지리지에 조천관(朝天館), 탐라현의 기록이 보일뿐이다.육지에서 제주도에 갈 때는 대개 나주에서 출발, 7주야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게 되고 해남이나 탐진(강진)에서 출발했을 때는 3주야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게 되며 이곳에서 3개의 섬을 지나 조천관이나 애월포에 닿게 된다.1714년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는 ‘세상에서 금강산은 봉래산,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은 영주산이라고 한다’하였는데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한라산과 영주산은 별개의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제주의 한라산 동남쪽 정의현 서쪽 20리에 있다. 영주산(瀛洲山)은 속칭 영지(瀛旨)인데 정의현 북쪽 4리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제주도 정의, 금녕, 함덕에 신선이 많다’하였고 세상에서 또 전하기를 ‘이 산이 곧 바다위의 삼선산(三仙山)의 하나라 한다’고 기록되었다.영조초기에 간행된 ‘동여비고(東與備攷) 지도에도 한라산과 영주산은 별개의 산으로 표기되었으며 영주산은 제주도 정의현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다.제주도에서 서복과 관련된 땅이름은 영주산, 서귀포, 정방폭포, 조천관 등이 있는데 조천관은 북제주군 중서부에 있는 읍으로 읍의 서남쪽에 한라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북쪽으로 남해와 접해있어 육지와 통하는 해상관문항 이었다.따라서 서복일행은 조천관에 도착후 한라산을 넘어 영주산, 정방폭포, 서귀포시 일대에서 불로초를 찾다가 단지 암고란만을 찾은 후, 정방폭포 암벽에 ‘서시과차(徐市過此)’란 글자를 남기고 서쪽인 중국으로 돌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즉 중국 산동반도 북쪽 봉래에서 출발, 우리나라 서해안의 여러섬과 남해금산, 지리산(지초봉)을 답사후 바다건너 제주도에 이른 서불일행 천여명은 수개월동안에 식량과 물자가 바닥나서 중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계속><사진설명>영주산이라 불리웠던 한라산 정상의 분화구 백록담(맨위), 영조초기에 간행된 동여비고상의 영주산과 한라산(중간), 고산자 김정호제작 대동여지도상의 제주도(맨아래). 제255호(2001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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