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 제4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칼과 학>

상감은 칼로 시작한다. 도공은 칼로 그릇의 표면을 파낸다. 여기에 흙을 채워서 무늬를 만든다. 찻잔에 학이 날고 항아리에 모란이 핀다. 완성된 상감청자에 칼의 흔적은 없다. 무늬는 칼을 넘어선다. 학 무늬가 새겨진 상감청자 도편을 움켜쥐고 한 줄, 한 줄 써나갔다. 도편의 가장자리에 손을 베이기도 하고 햇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학의 날개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작가의 말에서

제주43평화문학상 4회 수상작 칼과 학이 출간되었다. 1회 수상작 구소은 장편 검은 모래, 2회 양영수 장편 불타는 섬, 3회 장강명 장편 댓글부대에 이은 네 번째 수상작이다. 

칼과 학은 고려시대 문인과 무인의 갈등을 배경으로 고려청자에 상감 기법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피지배계급에서 민중계급으로 이행하려는 천민들의 갈망을 그려낸 작품이다. 
비색 청자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상감기법을 둘러싸고, 이를 억압하려는 지배계급과 예술의 혼을 담아 평화를 기원하는 천민계급의 첨예한 대결이 세세한 문체로 그려진다. 왕의 다회를 준비하는 상서 시랑 주상우는 개경 궁궐에 들어온 그릇들을 살펴보던 중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상감청자 찻잔을 보고 당황한다. 

그는 그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한편 그것이 불러올 변화에 위협을 느끼고 칼잡이인 동생에게 상감청자를 만든 이를 찾아서 처단할 것을 지시한다. 시대를 가르는 칼과 세상을 품으려는 예술의 암투가 시작된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소설가 이경자, 현기영으로 구성된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위원단은 격조 높은 시적 문장의 경쾌한 속도감은 고전적 소재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며 갈등구조는 평화의 미륵세상을 불러오려는 소신공양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장면이 지닌 극적 긴장감과 주제의 상징성에 심사위원의 일치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제4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칼과 학의 저자 정범종 작가<사진=강건모>.

자유에 대한 갈망, 평화에의 비원은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였다. 2007년까지 줄곧 희곡을 써오던 정범종은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새연이 입선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대 암울했던 시대상을 자유를 상징하는 새 모양의 연과 그것을 총으로 쏴 떨어뜨리는 사냥꾼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2007년 518문학상 희곡부문 우수상에 선정된 오방색 양말은 상무관(518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곳)을 찾은 한 여인이 희생자의 시신에 양말을 신겨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었다.
칼과 학은 정범종 작가의 첫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의 초고를 쓰고 다듬고 완성하는 데 십 년의 시간을 보냈다. 신문사와 잡지사 생활을 하는 틈틈이 작품을 썼다. 계기는 고려 상감청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부터였다. 

그는 간송미술관,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등 청자가 전시되는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았다. 도편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고려도공은 어떻게 해서 상감을 시작하게 된 걸까. 거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질문은 이어졌다. 상감의 무늬 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있는가?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정수사로 이어지는 30리 정도 되는 길을 걷다보면 근처 논밭에서 군데군데 떨어진 도편(陶片)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 깨진 조각들에도 비색이 남아 있고 무늬가 있습니다. 도편의 삶. 고려시대 민초들의 어려웠던 세상살이를 형상화하고 싶었어요.
 -작가 인터뷰에서

도공 윤누리가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며 학을 새기고 백토를 채운 데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상감의 의미를 사랑과 평화의 의미로 해석한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에 몰입되어 도자기를 빚기 위해 생활도예 교실에 등록하기도 했다. 그렇게 투박한 찻잔 하나를 만들었다. 사람들과 질흙처럼 섞여 지내면서 경쟁하는 삶 너머의 평화에 대해 생각했다.

칼과 학은 이제 소설가로서 첫 발을 뗀 그의 문학적 다짐일지 모른다. <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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