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아 / 전교조 제주지부 대의원

첫눈을 기다리는 소녀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눈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결별로 엄마의 모국인 베트남으로 돌아갔다가 12살이 되어 돌아온 아이는 한국어를 전혀 모릅니다. 사람들, 기후, 언어. 적응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고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지요. 처음 학교에 온 날인 작년 5월 초순 어느 날, 아이는 고운 분홍빛 겨울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같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한낮으로는 초여름 기운마저 느껴지는 날도 겨울점퍼를 벗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선생님, ○○이는 매일 저 옷만 입어요."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아이는 예쁜 꽃이 많았다는 베트남 옛집을 그리워하면서도 처음 맞는 한국의 겨울 추위를 견디며 흰 눈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지난겨울에 무릉은 좀처럼 눈이 쌓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월에도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돌담 너머로는 집집마다 매화가 펑펑 꽃망울을 터뜨리고 멀리 유채꽃은 신기루처럼 흐드러졌지요. 부모님이 일 나가시고 혼자 외롭게 집을 지키는 아이에게 눈이 선물처럼 내려주기를.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만 눈이 쌓이기를 바랐지요. 눈이 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한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듯 지난주에 드디어 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외로운 아이를 살며시 어루만지듯 그렇게 내렸습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를 생각했습니다. '너도 이 장면을 보고 있겠구나,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니?'

오늘은 새로 온 선생님들을 포함한 모든 교사가 만났습니다. 이맘때면 학교는 농부님들처럼 일 년 농사 준비를 시작합니다. 학교 기본교육계획을 짜고 학년교육과정을 짭니다. 학교교육을 통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아이의 몸과 마음의 고른 성장을 위해 무엇을 담을까?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지내지? 각자의 역량에 맞게 학년과 역할을 구분했습니다. 교무실에서 수업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을 사람들과 담임이 되어 교육과정을 운영할 사람들로 역할을 나눴습니다. 누군가는 작년에 했던 학년을 다시 한 번 맡아서 교육내용을 깊이 있게 연구하겠다고 합니다. 상급 학년과 연계해 학년 활동을 짜임새 있게 운영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등교사는 담임이 10개 과목을 모두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별, 학년별로 다른데 우리학교는 고학년 기준으로 9개 과목을 가르칩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주고받지 않으면 교육활동이라고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경력과 성별 등 구성원의 처지를 고려해 자신의 욕구를 내려놓고 공동체를 위한 선택을 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교사들을 등급별로 강제 서열화하고 허울뿐인 성과급 차등분배로 결속력을 찢어 놓으려는 시도와 장치는 현재진행형이지만 우리는 아직 이렇게 지혜롭고 건강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학교와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교사공동체 문화를 계속해서 지켜내야겠지요.

올해는 1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앞으로는 무릉의 막둥이들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겠네요. 저는 지금 첫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봄을 기다립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한 봄날의 교실 풍경이 둥실 떠오릅니다. 소녀에게 선물처럼 눈이 내렸듯이 내 마음에도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제 곧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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