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유적지 기행] 가시리·토산리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던 현장

학살의 현장으로 가는 도중 만난 표선해수욕장이다. 바다가 한없이 평화롭다.
길가에 유채꽃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이곳 4월이 더욱 서럽다.

표선백사장으로 가는 4월3일은 눈부시게 맑은 날이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가로수 벚꽃이 4월 찬란한 태양아래 팝콘처럼 터질 기세다. 맑은 하늘 아래 표선해수욕장은 금빛 모래로 찬란하다. 백사장 너머 보이는 바다는 짙푸르고 연푸르기를 교대로 반복하며 맑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표선 백사장 서쪽 도로를 따라 자동차가 도착한 곳은 표선도서관 주차장이다. 지금은 인근에 관광객들이 줄을 잇지만, 바로 주차장 동쪽 모래언덕이 1948년 12월에 군경이 표선면 가시리와 토산리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비극의 현장이다.

 

[남제주군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가시리]

4·3 당시 가시리에는 400여 가구에 170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주민 500명 정도가 희생당해 남제주군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마을이다.

비극은 1948년 11월 15일에 서북청년단과 충남부대 대원들이 마을을 불태우면서 시작되었다. 갑자기 닥친 토벌대에 현장에서 총살당한 주민도 있고, 살아남은 자들은 야산으로 몸을 숨겼다. 일부는 표선리나 토산리 등 인근 해안가 마을로 피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경은 피신한 주민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표선으로 내려간 사람은 표선국민학교에, 토산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토산 절간 고구마창고에 집단 수용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들 가운데 가족이 함께 모여 있지 않은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분리했다. 군경이 마을을 불태울 때 많은 이들이 야산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대다수 주민들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됐다. 이들 중 1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모두 표선리 버들못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토산마을에서도 희생은 이어졌다. 가시리 주민들은 절간고구마창고에 집단 수용됐으며, 거의 매일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절간고구마창고에 수용됐던 주민들은 표선리 백사장에서 학살됐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위패봉안실. 표선면 전체 희생자 가운데 가시리와 토산리 주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개대상도 아니던 토산리 주민들이 당한 집단 학살]

토산리 마을이 4·3 당시 참상을 당한 것은 토벌대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48년 12월의 일이다.

토산리는 토산1리(웃토산)와 토산2리(알토산)로 구분되는 마을이다. 당시 토산리는 200가호 정도의 조그만 마을로, 진압군의 관심을 받을 만한 배경이 없는 마을이었다. 토산2리는 해안에 위치해 있고, 토산1리도 해안에서 2~3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소개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도 주민 약 150명이 희생을 당했다.

그런데 1948년 12월 12일에 토벌대는 토산1리에 대해 소개를 명령했다. 집을 놔둔 채 밑으로 내려온 주민들은 토산2리 주민들에게 집이나 외양간을 빌려서 거처를 마련했다.

소개가 일어난 지 며칠 후인 12월 14일에 갑자기 군인들이 토산2리로 들이닥쳤다. 12월 15일(음력 11월 15일)이 되자 토벌대는 이 마을 주민들을 모두 마을 향사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들을 모두 결박했다. 또 여자에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젊고 예쁜 처녀들도 함께 결박했다. 그 날은 보름이었기에 달이 매우 밝았다고 한다.

군인들은 결박한 토산 주민들을 끌고 가서 표선국민학교에 감금한 후 모두 표선 백사장에서 집단 학살했다. 남자들이 학살된 것은 12월 18일과 19일 일이고, 여자들은 그 일주일 후에 화를 당했다.

표선도서관 동쪽 언덕이 48년 12월에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을 당한 현장이다. 그런데 현장에는 당시의 야만과 비극을 전할 표석 한 기도 세워지지 않았다.

당시 젊고 예쁜 처녀들을 골라 수용했다는 점과 남자들을 먼저 처형하고 여자들을 일주일 후에 처형했다는 점은 당시 여성 수감자에 대해 토벌군이 성적 유린을 자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토산리 주민에 대한 학살은 4·3 당시 토벌군이 자행한 수많은 만행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패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주민들이 당시 학살터라고 증언하는 표선도서관 동쪽 언덕에는 잡목만이 무성하고 아무런 흔적이 없다. 당시의 비극을 전할 만한 표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내막을 아는 이는 “원래 이곳에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려고 했는데, 터가 마땅하지 않아 하천리 한마음초등학교 인근에 위령비를 세웠다”고 전했다. 비극의 현장에 야만을 증언할 표석 한 기도 세우지 않은 것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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