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사람 그리고 문화 - 일본 규슈올레서 만난 제주(1)

이즈미 사람들에게 오루레 개장은 마을 경사였다.(사진=강올레)

# 오루레를 아십니까?

그날 그 동네는 완전 “경사났네, 경사났어”였다. 마을 북춤패가 신명나게 북을 울려대는 가운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니 조용하기만 했던 산골마을이 들썩들썩, 동네 손맛 좋은 어르신들이 밤새 정성을 들였음직한 전통 감주를 들어 너나없이 ‘건배’로 축하를 나누고, 마을에 하나뿐이라는 중학교 학생들이 손님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들고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눈이 마치치면 서로 싱글벙글, 마을 노인부터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여 기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사연인가.

그 동네는 이즈미(出水)라는 일본 마을이고 그날은 이 마을이 규슈 올레 18코스로 개장되는 날이었다.

“오루레”

올레는 일본 발음으로 오루레였다.

축사를 하는 시장은 선출직임에도 37년 동안 장수하는, 장수마을의 장수 시장이었다. 시장의 축사에 ‘오루레’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신들린 듯 ‘와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저리도 좋을까? 순간 옆에 있는 키 큰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털실모자를 쓰고 빨간색과 흰색으로 바둑판처럼 그려진 반바지, 거기에 멜빵까지, 다시 봐도 분명 40은 넘어 뵈는데, 방금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분은 누구며 왜 우는 걸까?

 그는 일본인으로 규슈올레 17개 코스의 완주자였다. 배낭이 신체의 일부처럼 등에 착 붙어있는 태나 그 배낭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뱃지들, 과연 완주자의 포스였다.

몇 년전, 자신이 사는 마을에 ‘오루레’가 생겼을 때도 그는 울었다고 했다. 너무 감개무량해서. 그런데 ‘이즈미 코스가 재수도 아니고 삼수 끝에 제주 올레의 인증을 받아 드디어 규슈올레가 되었다’는 시장의 말에 울컥, 자기네 마을도 올레 인증을 단번에 받지 못해 애태웠던 동병상련까지 겹쳤던 것이다.

도대체 이들에게 ‘오루레’는 어떤 것이기에 희비의 쌍곡선을 타는 것일까? 길 이외의 특별한 의미가 더 있는 것일까? 생각지도 않은 오루레 화두를 품고 소풍길처럼 무리지어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네비게이션에 안 나오는 샘물

강을 따라 걷는 고스넉한 길은 낯설지가 않았다. 강원도의 어느 마을과 닮아 있었다.

“아마, 여기쯤일 거야. 그이가 빠졌었다는 데가”

이즈미시 시청 직원 한 명이 올레의 취지대로, 아스팔트가 아닌 자연의 길을 찾아내느라 강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개장식 최대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자동차가 달리게 되면서 잃어버린 자연의 길, 길을 찾은 대신 그는 최신 핸드폰을 잃었다고 했다.

오래된 것을 회복하려면 새 것과 결별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네비게이션이 못찾는 옛길, 그 길을 찾아낸 것은 마을의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길만 찾은 게 아니었다. 그 길에 있었던 샘까지 기억해냈다. 길을 찾다가 ‘여기쯤에 샘이 있었던 것 같다’ 는 느낌으로 땅을 팠을 때, 퐁퐁 솟아나는 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무엇이 솟아났을까?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라면서 그 옆에 굳이 바가지를 놓아 둔 것은 왜 일까? 잃었던 물을 다시 찾은 기쁨을 맛보려고? 콘크리트 문명 속에서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보라고? 어쩌면 우리의 가슴 속에도 빠르게 사느라고 잃어버린 오래된 샘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일지 모른다.

오루레를 내다가 샘을 찾았으니 이즈미(出水)라는 동네이름이 딱 맞아 떨어졌네, 어설픈 풍수쟁이가 되어 걷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흥얼대며 강물을 따라 걷다보니 산이 나타났다. 강은 산을 끼고 흘러내려가고 나는 산길을 올랐다. 겨우 한 사람 발 디딜 좁고 가파른 길, 이 가파른 산에 길을 내느라 수고했을 손길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였을 이 마을의 산을 낯설고 낯선 사람들이 와서 걷는 것도 신기하지만, 와서 걸으라고 힘들여 길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더 신기했다.

올라갈 때 가팔랐던 길은 내려올 때도 가팔랐다. 그러나 잡념없이 짧은 시간에 산 하나를 넘은 성취감은 짜릿했다. 산밑에서는 마을 할머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끈한 미역스프를 끓여놓으시고. 간단한 음식이지만 깊은 정성이 느껴졌다.

하얀 위생복을 입고 손을 흔들어주는 할머니들께 “혼또니 오이시이”(정말 맛있어요)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스프의 온기만큼 마음이 따뜻해졌다. 도대체 오루레가 뭐관데 이 할머니들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서 이 고생을 하시는가.

끓는 솥앞에서 다음에 내려올 사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그들 또한 산을 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산골 마을에 온 세상 사람들이 찾아올 날, 그 날을 산처럼 한 발짝씩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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