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사람 그리고 문화 -일본 규슈올레에서 만난 제주(3)

길에 서면 우연히 만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강올레

해가 지고 버스는 커다란 목조주택 앞에 섰다. 규슈올레 19번째 코스, 미야마 기요미즈야마(淸水山) 코스가 개장되는 전야 만찬 모임장, 어둠속에  환영 현수막을 든 사람들이 우리를 맞았다. 신발을 벗고 삐꺽대는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다다미방에 네 줄로 밥상이 길게 이어져 있고 방석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갔을 때 여관에서 차려주던 밥상 풍경이 떠올랐다.

자리는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마주 보게 배정되어 있었다. 일본말을 모르는 내가 한국말을 모를 사람과 대면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 대략난감한 상황. 관광일본어 핸드북이라도 들고 올 걸 후회막급한데 때마침 연세가 꽤 있어 뵈는 일본 남자분이 들어오시는가 싶더니 딱 내 앞에 앉으신다, 소화 잘 되긴 틀렸구나. 공식 만찬행사가 시작되고 시장과 시의장의 인사말을 지나,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코스는 단번에 올레로 인증받은 곳입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길도 걷기 좋은 길로 지키자면 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사장의 말이 통역되자마자 내 앞의 파트너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더니 통역 내내 깊고도 깊은 공감의 표시를 쉬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한 템포 늦은 통역이 그를 이 마을 걷기협회 회장으로 코스개발에 1등 공신이라고 소개했다.

“앞으로 주머니에 정원가위를 챙겨 다니겠다”

그의 말에 웃음이 빵 터지면서 딱딱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녹아버렸다. 좀전까지만 해도 완고한 노인으로 뵈던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인사를 겸해 코스를 소개하는 안내지도를 펴보였다. 그가 밥상위로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정적인지, 분명히 일본말로 하는 데도 다 알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감정의 선은 언어의 장벽을 관통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무모해졌다. 올레정신이 무엇인가. 길이 난 마을과 그 마을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아까부터 눈여겨보았던 문간쪽 맨 뒤에 앉은 세 여자에게 돌진해 다가갔다. 양복 입은 남자들이 가득한 이 공간의 가장 모서리에  자리잡은 이 세 ‘아주머니’가 웬지 남 같지 않았다.

길에 서면 우연히 만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강올레

한국에서 시집왔다는 혼조상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오루레 길은 중년 여자들이 꼭 걸어야합니다. 가족과 살림에 지친 마음을 자연의 길에서 힐링하기 위해 한국에서도 제주올레에 여자들이 가족을 두고 혼자 걸으러 많이 옵니다” 그들은 통역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조상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는 당겨 앉으며 나를 밥상에 끼워 앉게 해주었다. 그 중 한 여성은 내 손을 잡으며 “내일 점심식사 때 내가 봉사를 하니 그때 보자”고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벤또와 싸비스를 힘주어 반복하는데 어찌 못알아 들으랴. 아, 이렇게 해서 국제결혼도 되는 거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옮겨 끼어 앉으며 어느새 시끌벅적 국수잔치집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전날 이즈미 코스도 만찬이 있었지만 그곳에선 이런 화합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왜 그랬지? 거긴 바닥이 아니었다. 호텔룸에 테이블마다 몇 명씩 의자에 나눠 앉았다. 자기 의자를 들고 가지 않는 한 다른 테이블에 끼어 앉을 수가 없었다.

맨 바닥의 힘, 누구라도 끼어 앉을 수 있게 품는 힘이 맨바닥에 있었다. 길도 그런 것이리라. 길을 내면 걸으러 오는 모든 사람을 품게 되고, 걷다보면 사람들은 그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품게 된다. 길은 결국 지구의 맨 바닥이고 길 위에서 모든 생명체는 서로를 품을 수 있는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 길에서 보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소유가 아닌 소통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잠자리에 누우니 하루가 참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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