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사람 그리고 문화 -일본 규슈올레에서 만난 제주(4)

▲ 남에게 폐끼치면 안된다는 일본의 예절문화에는 외로움이 배어있다. 오루레에 환호하는 이유는 소통과 연대의 욕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진 제공=강올레

남의 동네에서 환영받는 기적

미야마 코스에는 산이 두 개였다. 대나무로 울울창창했던 여신의 산을 내려오니 또 산, 거긴 대나무 보다 물이 많았다. 돌마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이끼들이 덮혀있는 길이 끝없이 이어져서 걷는 내내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청수산이라는 코스의 이름대로 푸른 산과 맑은 물, 어느 화장품 광고에서 모델이 혼자 걷던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내가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가 착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연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문득,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어찌 국경이라는 이름으로 조각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화낼 민족이 어디 있을까? 자연을 즐기고 사람 사는 정을 나누는 것 외에, 언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의 인간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뭐가 더 있을까?
자연보다는 돈, 나눔보다는 내 것, 국경, 국가, 이런 추상적인 관념의 틀에 매여 걱정하고 긴장하고 전쟁하는, 뉴스에 나오는 세상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삶인지,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걷는 건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은 환영에서 벗어나 진짜 삶을 살기 위하여.
오루레가 일본에서 대환영을 받는 이유도 ‘진짜 삶’에 대한 갈망 때문일지 모른다. 일본은 지방자치의 세계적인 모범사례이지만, 뒤집어보면 자기 동네에만 국한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일본 예절문화의 뒷면에는 나와 너를 가르는 단절이 엄연하다.

각이 서게 정돈된 주택가 담장의 나무들 속에는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갈세라 매일 잘라내야 하는 이웃간의 긴장이 숨어있다. 일본 화가 요시토모 나라가 창조한 캐릭터, 사납고 공격적인 얼굴 속에서 배어나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세계의 평론가들은 현대인의 소외라고 해석했지만 일본 사람들의 깊은 속내가 모티브였을 지도 모른다.  

▲ 남의 마을을, 남의 집 마당 앞을 이렇게 가까이 지나는 것은 일본사람들에게는 오루레가 만든 기적이다. /사진 제공=강올레

실제로 일본 올레꾼은 길을 걸으며 “남의 집 앞을 이렇게 가까이 지나가고 남의 집에 이렇게 들어오고...정말 꿈만 같다”고 하더니 급기야 오루레가 기적이라고까지 했다. 폐 끼치지 않는 외로운 예의와, 서로 민폐 끼치며 어울려 사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살맛나는 삶인지는 물을 필요조차 없이 자명한 것이다.
올레를 수입한 일본관광추진기구로서는 관광산업의 일환이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오루레는 자기 마을과, 자기 집 마당을 열어 소통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공식적 명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우리 마을이 아름답다하여 찾아와 주는 사람들의 존재는 분명 삶에 활력이 된다. 그들은 경계를 요하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이다. 손님이 오면 아이들이 기뻐서 흥분하는 이유는 정체되었던 집안 분위기가 확 바뀌기 때문이다. 소통의 에너지란 그런 것이다. 
오루레 코스 개장행사를 치르느라 들썩였던 두 마을에는 어떤 에너지가 돌고 있을까. 그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만큼 좋은 에너지를 주고 갈 수 있기를, 질문이 풀린 자리에다 작은 기도를 심으며 길을 걸었다. 대나무처럼 쭉쭉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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