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홍동 '도로목'에 마련된 흥숙 오정빈의 묘 탐방

흥숙 오정빈의 묘. 오정빈은 토평에서 태어나 정의현 최초의 과거 급제자로 이름을 올렸다.
흥숙의 할아버지 덕립 공과 할머니 제주 고씨의 무덤이다.
정의현 최초의 관리였던 만큼 흥숙의 무덤은 당대 으뜸이다. 담의 폭이 1m를 넘어 성담을 연상하게 한다.
무덤 주위 담에 각종 식물들이 군락을 이뤘다. 인동초가 계절에 맞게 화사하게 피었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벌써 여름이다. 들녘이 각종 식물들이 발산하는 연두색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서귀포시 서홍동에 소재한 흥숙(興淑) 오정빈(吳廷賓)의 무덤을 찾았다.

오정빈(吳廷賓)은 1663년(현종 4)에 현 서귀포시 토평에서 오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1673년(현종 14)에 제주로 유배온 신명규(申命奎)에게 대정현에서 7년간 수학했다. 이를 바탕으로 1687년(숙종 13)에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과거)에 합격했다.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의현에 유배 온 김진구(金鎭龜) 문하에서 고만첨(高萬瞻)·정창선(鄭敞選) 등과 동문수학했다.

김진구는 흥숙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山南佳士飫時書’(산남가사어시서, 산남의 뛰어난 선비 시와 문장이 넘치네)라는 시를 지어 칭찬했다.

김진구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오정빈은 훗날, 김진구의 아들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擇)이 제주에 유배됐을 때, 서로 만나 시와 편지를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다.

북헌은 김진구의 아들이자,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金萬基)의 손자다.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은 김만기의 동생이자 김춘택의 종조부다. 북헌은 김만중에서 문장을 익혔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커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1701년 소론의 탄핵을 받아 부안(扶安)에 유배된 후, 1706년에 제주로 옮겨졌다. 시골 엘리트와 거물 유배정객의 짧지만 깊은 인연의 계기가 마련된 것.

북헌은 훗날 ‘흥숙과 벗이 될 수 있어서 학문을 연마하는 틈에 서로 더불어 이리저리 거닐며 이와 같이 아주 즐거워서 산과 바다 천리 밖으로 고향을 떠나온 줄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후 1706년(숙종 32)에 순무어사(濟州巡撫御史) 이해조(李海朝)가 제주를 방문했을 때 실시한 제주 시재(濟州試才)에 고만첨, 정찬선 등과 나란히 합격했다. 오정빈은 이듬해에 한양에서 열린 계해 별시문과(癸亥別試文科) 전시(殿試)에 급제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룬 쾌거다.

김춘택은 전시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는 정빈을 위해 일종의 신원보증에 해당하는 서찰을 써줬다.

‘제주는 큰 바다 밑에 있어서 풍속이 본래 거칠고 누추해 글을 하는 선비들이 풍조를 떨치지 못했다. … 혹시 정말 우수하고 선발될 마땅한 사람이 제주에서 나왔다면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하겠는가, 지금 전시를 보러가는 사람인 흥숙 오정빈일 뿐이다.… 나는 한양의 사대부들이 흥숙에 대해서 혹시 제주의 급제자라고 하여 비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정빈이 제주에서 실시된 전시에서 급제한 것을 두고 서울의 선비들이 우습게 여길까 염려해 써준 편지다.

당시 제주에서는 글공부를 하는 선비가 드물었다. 이마저도 출중한 이들은 대부분 제주읍 선비들이었다. 정의현 선비 가운데 문과에 입격한 자로 오정빈이 처음이어서 모두 그를 부러워했다.

그는 성균관 박사·전적·예조좌랑·춘추관 기사관 등을 두루 역임하고, 1710(숙종 36년)년에 만경(지금의 전북 김제)현령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가 만경현령으로 부임한 이듬해, 북헌은 제주에서 임피(지금의 군산시 임피면)로 이배(유배지를 옮기는 것)됐다. 당시 정빈은 만경현령 신분으로 북헌을 찾아가 음식을 대접하며 위로했다.

오정빈은 친구와 재회해 시문을 교환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짧은 관직을 뒤로하고 관가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무덤은 지금의 서홍동 ‘도로목’에 마련됐다. 부인 강(姜)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흥숙 부부의 무덤 서편에는 흥숙의 조부 오덕립(吳德立) 공과 부인 고(高)씨의 묘가 마련됐다. 조부의 묘를 손자보다 초라하게 조성할 수는 없다는 당대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돼, 더 크게 조성됐다.

조부와 손주 내외의 무덤 네 기가 차지하는 면적이 1000평이 넘는다니, 당시 흥숙이 차지하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정의현 최초의 관료였던 만큼, 동자석이나 비석 등에서 그의 무덤은 당연 도내 으뜸이다. 그의 비석에는 동문수학했던 고만첨의 글씨가 남아있다. 무덤을 둘러싼 돌담도 폭이 1m를 넘는다. 성을 연상하게 하는 담 주변에 나리, 인동초, 청미래 넝쿨 등이 군락을 이뤘다.

군위오씨 중말파 후손들은 지금도 토평동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무덤을 관리하는 한 인사는 “무덤의 규모가 방대해서 관리하는데 드는 인력과 비용이 상당하다. 300년 넘는 세월동안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했는지 신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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