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이자, 대한민국에 제주 올레길 열풍을 일으킨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1970년대 말, 한반도의 끝자락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하던 여대생 서명숙은 돌연 감옥에 갇힌다. ‘천영초’라는 여인과 함께. 이 책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 긴급조치 세대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실존인물 ‘천영초(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72학번)’에 대한 기록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에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이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천영초는 “당시 운동권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였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태일’처럼 깊은 화인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오늘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영초언니는 불의의 사고로 말과 기억을 잃어버렸고, 시대는 그녀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천영초와 서명숙, 두 여성의 젊은 날에는 박정희 유신정권 수립과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박정희 암살,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 특유의 집요하고도 유려한 글쓰기로 독재정권하 대학생들의 일상과 심리적 풍경을 섬세하게 복원해나가며, 한 여자가 어떻게 시대를 감당하고 몸을 갈아서 민주화에 헌신했는가를, 그리고 그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에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을 겪었는가를, 그 결과 어떻게 망가져갔는가를 증언한다. 그 과정에서 나어린 여대생들에게 당대의 고문형사들이 가한 소름 끼치는 협박과 고문들, 긴급조치 9호 시대 여자 정치범들이 수감된 감옥 안의 풍경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한때 서명숙에게 영초언니를 회상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고, 식은땀에 젖어 한밤중에도 소스라치며 일어나게 만드는 처절한 악몽이었다. 그래서 몇 번인가 이 원고를 쓰다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달 전 부패한 박근혜 정권 뒤에 숨어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몰려든 취재진들 앞에서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며 억울하다고 외친 순간, 그는 다시 영초언니를 떠올렸고 맹렬하게 원고를 집필해 마침내 ‘천영초’라는 여성의 초상을 완성해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진짜 ‘억울’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역사가 호명해야 할 이름은 누구인가. 서명숙의 펜 끝에서 되살아난 영초언니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나라에는 민주화운동의 이력으로 명망을 얻은 이들도 있고, 그 이력을 보란 듯이 배반하여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름 없는 투사’들은 독재정권하에서 청춘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망가졌지만, 그 어떤 보상도 명예도 얻지 못한 채 세월 속에 잊혀지고 스러져갔다.

영초언니는 역사가 잊어버리고 지워버린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다. 서명숙은 이 책을 통해 서럽고 억울한 그들의 영혼에 곡진한 ‘해원굿’ 한 판을 바친다.

기억을 잃고 서너 살 정도 지능의 아이가 되어버린 영초언니 대신, 그녀를 기억하고 호명하는 것은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겨졌다. 당신의 젊은 날에도 ‘영초언니’가 있는가? 세상을 바꾸자고, 불의한 것에는 마땅히 분노하라고, 약자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자고 손을 뜨겁게 쥐어주던 영초언니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당신 가슴속의 영초언니는 아직, 살아 있는가?

“꽃보다 가벼운 이슬로 사라져갔던” 그 수많은 청춘들의 얼굴을 하고, 다시 살아난 영초언니가 지금 우리 곁으로 온다. 천영초, 이 이름을 기억하라.

 

지은이 : 서명숙

출판사 : 문학동네

발행일 : 2017년 5월 18일

가 격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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