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주 제주유배2] 추자도에서 오씨와 황씨가 혼례를 맺지 않은 사연

추자도 예초리 해안 황새바위. 정난주가 아들 황경한을 버려둔 곳이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십자가를 조성했다.

유배는 죄인을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보내는 형벌이다. 조선시대 행해졌던 유형을 좀 더 구분해보면 천사(遷徙)와 중도부처(中途 付處), 안치(安置), 충군(充軍), 위노(爲奴) 등이 있었다. 천사는 단순히 고향에서 내쫒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중도부처는 관원을 유배시킬 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중간에 머물게 하는 형이다.

안치는 일정한 장소에 격리시켜 거주의 제한을 두는 것이고, 충군은 죄인을 군역에 복무하게 하는 형벌이다. 위노는 죄인을 노비로 만드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죄인에게 위노형을 내리는 경우는 대부분 대정현으로 유배시켰다.

대정현은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였다. 조정의 관점에서 보면 멀기도 했거니와 지대가 낮고 습한데다 바람마저 거세서 생활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영조 때 대정현 감산촌에 유배됐던 임징하는 “대정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 어찌 유배살이의 어려움을 알겠냐”고 한탄했을 정도다.

천주교 탄압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정난주는 어린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게 됐다. 정난주와 아들 황경한에게 내려진 형이 위노(爲奴)에 해당한다.

정난주는 1801년 11월 8일, 어린 아들과 함께 호송선을 타고 유배길을 올랐다. 정난주 모자(母子)를 태운 배는 강진에서 군영포, 고자도, 삼내도를 지나 추자도로 향했다. 탐라국 시대부터 추자도는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이 바람의 방향이 맞을 때를 기다리는 후풍처였다. 정난주는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제주에서 그와 아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추자도 예초리 오씨 집안에 입양된 황경한은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곳곳에 살고 있다. 최근에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표석을 세웠다.

그만큼 제주 유배는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는 형벌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역모죄로 걸려 노비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상황이 아니었던가. 앞선 사례들을 살펴보면 정난주 모자의 목숨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방원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들이 어린 세자를 믿고 권력을 휘두르다 대신들의 탄핵으로 제주에 유배됐다. 한 때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왕의 처남들도 결국 제주에서 왕의 자진 명을 받고 허무하게 숨을 거뒀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총애들 받던 보우대사는 왕후가 죽자 제주로 유배됐다. 그런데 당시 제주목사로 부임한 변협이 장정들을 동원해 보우를 매질해 죽게 했는데, 이일을 계기로 변협은 유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유교 근본주의 시대, 일종의 ‘매카시즘’이 빚은 참극이다.

정난주는 모자의 생존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느꼈다.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 정난주는 아들의 목숨을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호송선이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경한이가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애원했다.

그리고 엄마의 간절한 애원이 사공의 마음을 움직였고, 사공들은 나졸들에 술을 먹여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정난주는 배가 추자도에 도착해 머무를 동안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바닷가 황새바위에 어린 아기를 버렸다. 아기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배는 거센 물살을 헤치며 제주로 향했다.

추자도에 전승되는 얘기로는 근처에서 소에 풀을 먹이던 부인이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저고리에 아기와 부모의 이름, 아기의 출생일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아이를 길렀는데, 양아버지가 예초리 어부 오상선이다. 황경한은 오씨 집안에서 입양돼 자랐기 때문에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는 서로 혼인을 맺지 않는다고 한다.

1801년 12월, 정난주는 별도포(화북항)에 도착했다. 화북항은 육지와 제주를 연결하는 주요 관문이었다. 우암 송시열과 동계 정온, 장령 임징하, 정언 임관주, 정헌 조정철,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을 포함해 수많은 유배객들이 별도포를 통해 제주에 들어왔다.

한편, 어린 아들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길을 떠난 정난주는 동짓달 찬바람을 맞으며 제주시 별도포(화북항)에 도착했다. 별도포는 조선시대에 조천포와 더불어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는 주요 관문이었다. 정난주 이전에 우암 송시열과 동계 정온, 장령 임징하, 정언 임관주, 정헌 조정철 등을 포함해 수많은 유배객들이 이 포구에 눈물을 남겼다.

관가에서 나온 나졸들이 지키는 가운데 주막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늘날의 중산간 길을 따라 대정 관아로 향했다. 정난주가 별도포에서 대정현으로 가는 자세한 여정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정난주보다 39년 뒤에 대정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가 걸었던 길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니,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다네. 그리고 또 밀림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소목들로 겨울에도 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다네.’-<아우 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

정난주는 대정현 관아로 호송된 후 대정현 토호 김석구(金錫九)의 집에 적소를 정하고 대정현의 관노로 일했다. 당시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고 있었다.

김석구에게는 김상집이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정난주를 잘 따랐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정난주는 해배된 이후에는 김상집의 가족들과 가까운 친족처럼 지냈다고 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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