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먼저 경험한 제주민들, 낡은 조정보다는 '서학' 정난주에 우호적이었을 것

대정현성. 정난주가 대정현에 유배되고 성 밖에서 생활했다.
천주교 제주교구가 최근에 정난주의 무덤 인근을 성지로 조성했다.

정난주가 대정에 당도했을 때는, 대정현감은 이흡이었다. 그에 대해 판단할 만한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1801년 봄에 부임해서 1804년에 대정 관아에서 숨을 거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승된 얘기로는 정난주가 대정현 관아로 호송된 후 대정현 토호 김석구의 집에 적소를 정하고 대정현의 관노로 일했다. 당시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 사이였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대정현감 이흡이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김석구에게 정난주의 적소를 마련하도록 부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반대로 김석구가 대정현감과 짜고 위노형을 받은 정난주를 사실상 자신의 사노비로 부리는 ‘부정특혜’를 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석구는 상처(喪妻)를 해 재혼을 했는데 그 이후로 아들 김상집을 구박했다. 정난주는 김상집을 자식처럼 거두어 지금의 신평리에서 키웠다고 한다. 1814년경이었다고 하니 정난주는 그 이전에 해배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상집은 장성한 뒤에 정난주를 친모처럼 봉양했다.

정난주의 별명은 처음에는 ‘서울 아줌마’에서 나이가 듦에 ‘서울 할머니’였다. 주변에 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그렇게 살다가 제주에 들어온 지 37년 만인 1838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난주가 사망하자 김상집은 모슬봉 북쪽에 양모의 시신을 안장했다.

추자도 예초리포구. 탐라국 이래로 제주섬 사람들은 육지를 오갈 때 이곳에 기착해 바람 방향이 맞을 때를 기다렸다. 필자는 정난주가 육지를 오가던 사공들을 통해 아들 황경한의 소식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김상집에게는 시백·시원·시현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영수·영호·영학·영관 등 네 손자가 있었다. 김상집은 네 명의 손자 명의로 추자도에 있던 황경한의 집으로 정난주의 부고(訃告)를 전했다.

1839년 음력 1월 23일자로 보낸 편지는 추자도 황경한의 둘째 손자 황우중에게 전해졌다. ‘한양에서 귀양 와서 살던 정씨가 1838년 2월1일 묘시에 제주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무덤의 위치는 대정 서문 밖의 모슬봉 아래 한굴왓이며 무덤의 관리자는 영수·영호·영학·영관’이라고 밝혔다.

이런 정황들에 비춰보면 정난주는 추자도에 살던 황경한의 소식을 듣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여러 제약으로 직접 친아들을 대면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당시 추자도는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배들이 중간 기착지였다. 사공들은 추자도에 들러 바람 방향이 맞을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들이 정난주와 황경한 사이에서 서로 소식을 전해줬을 것이다.

정난주는 양아들인 김상집에서도 추자도에 두고 온 경한에 대해 얘기를 했을 것이고, 양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던 김상집은 황경한의 집으로 양모의 부고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난주는 제주에 도착하기 전,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 제주에서의 생활은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는 아니었고 정난주는 섬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았다. 제주에 대한 예측과 현실의 괴리, 필자는 그 배경으로 이전 18세기에 누적된 제주의 경험에 주목한다.

18세기는 대항해시대가 전성기에 달해 서양의 배들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던 시기다. 그동안 서양에 대해 문을 닫고 있었던 일본도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난학’이라 하여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이때, 제주사람들 가운데 우연히 서양의 선진 문물을 목격한 자들이 늘었다. 대부분은 항해 중 표류해 일본이나 류쿠(오키나와), 안남국(베트남), 대만 등지에 표착한 사람들이다.

18세기 네덜란드 상선. 18세기에 제주 사람들은 항해 중에 표류해 우연히 서양문물을 접한 자들이 많았다. 이들의 경험담은 세간에 화제가 되어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표착지에서 서양의 거대 함선과 선진 의술, 풍족한 먹거리 등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별천지를 경험했다. 이들의 경험담은 당시 세간의 화제가 돼, 정운경은 표착민들의 경험을 엮어 ‘탐라문견록’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은 훗날 실학자들의 필독서가 됐다.

그리고 조선에서도 정조시대에 개방적인 풍토 속에서 실사구시를 추구하던 분위기가 잠시 싹을 틔우기도 했지만, 정조가 사망하면서 르네상스는 막을 내렸다.  '근대'를 먼저 간파했던 제주사람들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상징되는 낡고 무기력한 정부에 실망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천주교를 서양학문(서학)이라 여겼던 시대에 제주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낡은 조정보다는 정난주에게 더 우호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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