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욱의 생생농업 활력농촌-9

농촌에서 일하면서도 농사를 짓지 않다보니 힘쓸 일이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한 주에 한 번 농산물을 꾸러미로 포장하는 일은 이제 7년차이다 보니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7년째 농산물 포장 상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내게도 긴장해야 하는 때가 있으니 바로 6월의 마늘 수확과 보리 도정 때다. 마늘이야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손이 많이 가는 건 알겠는데 보리 도정이 왜 힘든 일일까?

처음엔 보리 도정이 기계의 전원 혹은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일인 줄 알았다. 몇 년간 일을 도와주셨던 조합원 형수님이 도정할 때는 몇 시간을 마을방앗간에 계셔서 혹여 보리가 남의 물건과 섞일까봐 지켜봐야 하는 줄 알았다. 시간을 죽이며 그냥 지켜보면 되는 일인 줄 알고 방앗간을 찾았는데 아뿔싸,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잘 말린 보리 가마를 조합원 농가에게 사와서 도정기계에 집어넣는 일부터 시작된다. 트럭에서 도정기계까지 5미터 거리도 되지 않다보니 일일이 손으로 40kg 보리 가마를 날라야 한다. 기계가 크지 않아서 한 번에 3가마 정도씩만 도정이 가능한데 보통 30분가량 걸린다. 도정이 끝나면 보리쌀과 쌀을 깎으며 나온 가루들이 섞여 있는데 이를 다시 분리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은 기계가 바람을 불어서 털어낼텐데 60년 된 방앗간에서는 보리쌀을 쌀통에 부은 후 체에 내려서 분리한다. 보리쌀이 중력에 의해 떨어지며 가루와 분리되는데 이 또한 사람 손으로 진행된다. 보리쌀을 분리대에 붓고 다시 가루와 분리된 것을 마대자루에 담는 데에 둥그런 플라스틱 함지박이 쓰인다.

흔히 볼 수 있는 보리 한 가마를 도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과 힘이 들어야 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한 가마를 도정하는데 들어야 하는 보리의 무게만 단순 계산해봐도 100kg(도정보리의 가루를 털고 다시 담는데 까지 무게)에 이른다. 노동력과 시간을 줄여볼 심산으로 보리와 밀을 도정하는 방앗간을 여기 저기 수소문했으나 멀리 제주시내에 있었고 작업 또한 10일이나 밀려 있었다.

무릉리 방앗간은 60년이 넘은 마을 방앗간이다. 한창 찰보리 수확을 많이 하고 쌀이 귀할 때는 마을마다 방앗간이 있었는데 육지에서 지은 쌀이 흔하게 수입되고 보리농사가 줄면서 마을 방앗간이 모두 문을 닫았다. 옛날에 사기수(무릉리 좌기동의 옛 지명)는 잡곡으로 유명한 동네로 도정을 많이 할 때는 무릉리 방앗간에서만 만 가마를 도정했다고 한다. 제주시 오일장에 보리를 가득 싣고 가면 상인들이 서로 보리를 사려고 줄을 서던 좋은 시절이 있었다.

최근에는 제주농협에서 맥주보리를 좋은 가격에 수매하기 때문에 보리 생산량은 늘었으나 찰보리 생산량은 더 줄었다고 한다. 방앗간을 운영하는 김기선 할머니는 이제 힘이 부쳐서 마을 분들이 부탁하는 정도의 작은 양만 도정을 하고 있다. 젊을 때는 방앗간을 운영하다가 외지로 나가 다양한 사업에 손대기도 했으나 모두 망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방아를 찧으며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냈다.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져 60년 된 방앗간이 문을 닫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들이 농사지은 보리쌀을 도정하기 위해 멀리 제주시까지 가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힘들다면 제주에서 생산해 육지에서 도정한 소포장 보리쌀을 사먹을 수밖에 없는 웃픈 현실이 미래가 될 것이다. 제주에서 생산됨에도 가공이 안 되어 값어치를 제대로 못 받는 잡곡들이 얼마나 많은가. 최근까지 전국 메밀의 30%가 제주에서 생산됨에도 도정되는 곳이 하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한 번에 소나기 쏟아지듯 쏟아지다 보니 지역에 이를 담을 사업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 바로 제주의 로컬푸드가 아닐까?

김기선 할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아이들을 위해 잡곡 도정을 했지만 지역으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일을 지난 60년간 해오셨다. 이제 누군가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일을 위해 또 나서야 하는데 그게 누구일까.

글·홍창욱 / 무릉외갓집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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