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사람 그리고 문화
제주에서 몽골까지는 4시간이 채 안 걸렸다. 밤에 내린 울란바토르 국제 공항,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칭키스칸이라는 글자, 순간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몇 년 전 미국 맨하탄을 방문했을 때 마침 그곳의 한 유명 미술관에서 칭키스칸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칭키스칸은 작은 전시실 안에서도 대단한 위엄과 파워를 뿜어내고 있었고 백인들은 그 앞에서 적잖이 압도당한 자세로 감탄을 연발하며 관람하고 있었다. 미국은 다인종 합중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그 땅에서 아시아인들은 허드렛일 위주의 서비스업종에 몰려있으며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 작은 방안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반전, 그걸 목도하면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고려시대 우리 조상들을 수탈했던 존재에게 아시아인으로서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순 때문이었다.
“몽골 사람들은 시력이 아주 좋습니다. 평균 4.0입니다”
세상에, 우리나라 시력검사표에는 나오지도 않는 4.0이 실제로 이 나라 사람들의 눈이라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주변을 보느라 그리 된 걸까, 드넓은 평원에서 양떼를 지키며 멀리 보는 습관이 있어서일까.
“몽골과 우리는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이죠.”
그렇다. 바로 이웃의 중국은 영어 어순인데 우리와 몽골은 같은 어순이다.
“알타이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금입니다. 몽골에 지하자원이 어마어마한데 금이 아주 많아요”
이건 교과서에서도 못 배운 산지식이네.
“여기 기차는 80량 내지 100량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고 있자면 끝이 없죠. 러시아까지 가요. 국경에서 바퀴를 광폭으로 갈아 끼우고 갑니다”
이것이 대륙의 스케일이구나. 육로로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간단다.
“실평수 50평 되는 아파트에 한달 난방비가 얼마쯤 될 거 같으세요? 더울 정도로 따뜻하고 뜨거운 물 맘껏 쓰고, 한달에 한국돈 일만원 정도입니다.”
세상에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있을 줄이야.
“중앙난방식이구요, 석탄 매장량이 엄청나서 그렇습니다. 물도 전부 지하수를 먹구요”
이렇게 깨알같이 몽골 현지 가이드를 해준 이는 몽골 거주 17년차 한국인이었다. 서울에서 명문대를 나와 광고회사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지친 삶을 치유하고자 세계 여행을 떠난 게 마흔살이라고 했다.
“고속성장, 경쟁, 이런 것에 치여 살다가 몽골에 오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더라구요. 자연이 살아있고 사람들이 순박하고, 좋더라구요”
사람 사는 데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랴 싶어 그대로 몽골에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호텔에서 출발한 버스가 시내의 아스팔트를 지나 롤로코스터처럼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땅이 있을 뿐. 이것이 지구의 맨살이구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를 땅인줄 알고 살아온 세월 속에 잊은 지 오래된 지구의 맨살, 거대하게 펼쳐진 그 맨살 위에 발이 붙은 듯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드넓은 구릉성의 평원, 그 굴곡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이 거대한 얼굴 위의 좁쌀만한 점들로 보인다. 400명의 올레꾼이 한 줌 거리 밖에 되지 않다니! 땅이 넓으니 하늘도 넓고 흰구름도 얼마나 큰 솜사탕들인지.
“양떼다!”
언덕 몇 개를 넘으니 게르촌이 아스라이 보이면서 양들이 보였다. 몇 마리 안되어 보였는데 막상 세어보니 백 마리가 넘었다.
“저 양들이 그러겠다. 누가 인간들을 여기다 풀어놓았어?”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길게 웃을 수가 없었다. 흙먼지가 날리기 때문이었다.
몽골평원은 목초지에서 사막으로 변해가는 와중이었다. 얼마전 제주포럼에서 엘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지적했던 지구촌의 기후변화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게르에서의 잠은 참 특별했다. 원형의 방도 재미있었고, 나무를 때는 난로도 어릴적의 향수를 자극했지만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자연의 자장가였다.
“제주는 1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몽골에 제주올레를 ‘수출’하는 날이 오다니! 이제부터 몽골과 제주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의 울컥하는 목소리는 나만 들은 것일까.
그래, 몽골과 새로운 역사, 이제 우리는 하나의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거야. 길을 함께 걷다보면 길동무가 되고 친구가 되면 서로 돕고 나누면서 사이좋게 살아가게 마련 아닌가.
오한숙희 / 여성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