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 3

기미년(1919) 3·1운동보다 약 5개월 먼저 제주 서귀포 법정사에서는 스님과 지역주민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 있었다. 이름하여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내년 2018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서귀포신문은 제주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정명(正名)과 함께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개요
2.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
3.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마을과 주민
4.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왜곡

3.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마을과 주민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서귀포지역의 도순리, 월평리, 영남리, 대포리, 상예리, 서홍리, 법환리, 중문리, 회수리 일대 등 서귀포 주민 700여명이 참여했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도의 항일운동 중 가장 많은 주민이 참여한 항일운동이며 그에 따라 많은 지역 주민들이 수감되는 등 일제로부터 고초를 당했다.

우선 이렇게 서귀포 지역의 많은 마을에서 참여하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법정사의 역할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불교는 조선의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사찰들의 대외적 활동은 미미한 상황이었다. 제주도에는 관음사가 창건되어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서귀포 지역의 포교를 위해 법정악에 법정사가 창건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14년 이래 1918년까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법정사 예불을 통해 일본의 국권 침탈이 부당하며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설법했다. 이에 법정사 신도들을 중심으로 해서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에 동의한 서귀포 지역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1918년, 법정사의 승려들은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거행하기 위해 6개월 전부터는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이 기간 동안 법정사 신도와 인근 주민들에게 항일운동의 의지를 알려 준비에도 동참시켰다. 정구용은 1918년 9월 말에 “각 면 각 리장은 바로 리민 장정을 모아 솔군하고 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 지내에 집합하라. 그러한 한편 4일은 대거 제주향을 습격하고 일본인 관리를 체포하고 일반 일본인을 내쫓아야 한다.”고 격문을 써서 각 마을 구장에게 나누어주어 미리 거사를 알렸다.

고용석은 김봉화의 동생으로부터 거사 동행을 권유 받아 거사 전날 법정사로 향하기도 했다. 법정사 항일운동이 인근 주민들에게 이렇게 사전에 고지되었는데도 일제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던 것은 주민들 또한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항일운동이라는 거사가 중대한 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이 지켜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법정사가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1918년 10월 7일 새벽, 도순리 법정사에 모인 선발대 34명이 절을 출발했다. 우선 먼저 도순리 윗쪽의 상동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유했다. 이어 영남리에 들어가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 25명을 참여시켰고, 서호리와 호근리, 강정리를 거쳐 하원리로 향했다. 하원리 인근에서 참여 인원이 삼 사백여명으로 불어났다. 강창규는 하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일행을 구타 결박하도록 지시했고 백여 명의 선봉자가 이들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했다.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마을에서 700여명이 참여했다.

중문 경찰관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고 경찰서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사르는 기세 속에 서귀포 기마 순사대가 출동해 66명을 검거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 조사하면서 체포해 4차례에 걸쳐 구속이 행해졌다. 이들의 명단이 『형사사건부』로 남아있다. 『형사사건부』에 의하면 도순리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대포리, 상예리, 서홍리, 법환리, 중문리, 회수리, 덕수리 등에 주소를 둔 사람들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들 중 46명에게 형이 내려졌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17명으로 제일 많이 검거되었고 다음으로 30대 15명, 20대 14명 순으로 검거되었다. 재판은 한 차례만 있었고 채 4개월이 걸리지 않고 판결이 종료되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이 징역 10년형을 받는 등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 주로 적용되었고 방화죄와 상해죄, 총포 화약 취급령 위반죄 등이 적용되었다. 가담의 정도가 약하다는 참여자에 벌금 30원(불완납시 노역장 유치 30일)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나긴 일제의 압정 속에 살아오면서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는 물론 유족들까지도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자긍심보다는 체제에 저항했다는 낙인으로 오랫동안 힘들게 살다가셨다. 이들의 용감한 저항을 기억해야하는 것은 그들 노고의 덕으로 잘 사는 오늘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그러나 아주 손쉬운 일일 뿐인 기억이라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한금순 / 문학박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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