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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세력의 역할과 조직 정비8·15 기획 -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
서귀포신문 | 승인 2017.08.21 17:06
(왼쪽부터)김연일, 강창규 , 박주석, 방동화, 정구용.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을 비롯한 강창규, 방동화, 정구용 등의 승려와 박주석 등이다. 이들 주도세력들은 1914년부터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경주 기림사 승려였다. 김연일이 어떻게 제주도로 들어왔을까를 살펴보면 그 정점에 승려 박만하가 있다. 제주도 출신 승려인 강창규 김석윤 방동화 등의 스승이 박만하이며 또한 박만하는 제주도 관음사 초창기 활동을 도운 승려이기도 하다. 박만하의 제주도 제자인 강창규와 김석윤 방동화는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나라 잃은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 활동을 함께하는 동료들이었다. 강창규는 법정사 항일운동에서 선봉대장으로 앞장서고, 김석윤은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이었으며 법정사 창건에 기여했고 박만하를 중심으로 한 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법정사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이들 두 사람은 1894년 당시 전북 임실군의 사찰에 있었다. 이들의 항일 의식은 바로 이 시기 이 지역의 동학혁명의 사회적 흐름을 체험하고 온 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석윤과 강창규는 방동화를 기림사의 박만하에게로 보내어 출가시켰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김연일은 강민수, 정구용, 김인수, 김용충, 장임호 등 6명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와 법정사에 거주한다. 김연일의 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연일은 우리나라의 닻에 해당하는 제주도로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되면 전국으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올라간다고 하여 제주도로 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필요한 자금을 관 속에 숨겨 들여오기 위해 조상 묘를 조천 미밋동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는 김연일가의 세보로 증명되고 있다.

제주도로부터 시작하는 독립운동 의지를 가지고 제주도에 들어온 김연일은 5년여 동안 법정사에서 신도들에게 반일사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으며, 결국 지역 주민 700여명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법정사의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들은 법정사 예불일을 통해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역설해 왔고, 1918년 4월경부터는 구체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불교도 및 농민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하는 등으로 거사 6개월 전부터 구체적인 조직을 구성했으나 일제 경찰에 노출되지 않고 1918년 우란분절 예불을 기해 법정사 항일운동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외세에 대한 인식도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 제주도민은 광청리 중심의 방성칠의 난, 대정 중심의 이재수의 난 등으로 외세 침탈의 폐해를 인식한 저항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수탈에 저항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법정사 승려들의 국권회복 활동 계획에 지지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제주 법정사 터.

강창규는 선봉대장으로, 방동화는 좌대장으로 현장의 참여자들을 이끌었고, 정구용은 격문을 작성해 항일 운동의 목적을 알리며 참여자를 구하는 데에 힘을 보태었다. 박주석은 모사로 거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연일은 주도자로 징역 10년형을, 거사 현장을 지휘한 선봉대장 강창규는 징역 8년형을 받았다. 박주석은 가혹행위로 인해 옥사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은 강창규를 대신해 가혹행위를 당한 동생 강수오는 구속 중 사망하기도 했다.

형기를 마친 이들은 법정사 항일운동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이어나간다. 김연일은 경상북도로 돌아가 관음사를 창건해 승려생활을 지속하면서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정구용은 경상북도 포항시 보경사 일주문 앞에 있는 ‘기미 3․1 독립의거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 이후에는 경상도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강창규는 1943년에야 제주도로 돌아온다. 대정면 동일리에 서산사를 창건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찰을 창건하면 사찰령에 의해 총독부에 설립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산사는 신고 절차를 밟지 않는다. 따라서 강창규와 서산사는 일제 당국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의지를 드러내 준다.

한금순 / 문학박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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