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 & 사람 그리고 문화-17

하나은행 서귀포지점 강당.

“선생님, 죄송한데요, 강연 장소가 갑자기 변경이 좀 되었습니다”

강연 하루 전날, 걸려온 전화에 ‘알았다’고 답은 했지만 속으론 영 마뜩치가 않았다. 강연을 들을 사람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인데 왜 그렇게 교통도 복잡하고 번잡한 동네로 장소를 바꾼단 말인가.

강연 당일, 강연장에 조금 일찍 갔다. 새로운 공간과 낯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복잡한 동네라 역시 주차가 어려웠다. 2층이라서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강연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대박’이라는 청소년 전문용어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은은한 조명에, 원목으로 꾸며진 실내, 한켠에 미니 음료바까지, 이건 강연장이 아니라 카페였다.

“선생님, 장소 괜찮죠?”

“완전 좋은데!”

전날 떨떠름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아니 좀전까지 볼이 메어있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래서 저희가 장소를 갑자기...”

“그래, 그래, 잘했어, 잘했어”

강사경력 30년의 내 경험칙 중 하나가 ‘시각적인 만족감은 그 장소에 오래 머무르고 싶게 하기 때문에 집중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강연을 맡고 내심 걱정이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게임 키보드를 빛의 속도로 누른다는, 1초의 지루함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청소년이 아닌가. 이들에게 90분간의 ‘인문학’ 강의,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는데 강연장이 카페이니 ‘앗싸’ 소리가 나올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들어서는 아이들과 인솔교사들도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미 절반의 성공을 잡고 출발한 강의는 무사히 90분을 달성했다. 강연에는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경험이 하나 더 추가되는 순간, 낯선 남자 한분이 강연장으로 들어왔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러분들이 이곳의 가장 중요한 손님, VIP입니다. 이 장소가 마음에 드셨다면 앞으로도 자주 놀러 오시고 필요하면 무료로 빌려 쓰세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진행스탭의 귀띔으로 ‘이 장소를 무료로 빌려준 지점장’이며 음료수 후원도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가가 감사를 전하니 ‘지점장’님은 손사래부터 쳤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이 장소를 이렇게 활용해 주시니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릅니다. 좋게 만들어 놓고 썩히면 아깝지 않습니까. 지역에서 모임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쓰십시오. 영업시간 이후에도 괜찮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공간나눔은 제주의 오랜 전통이다. 쉼팡, 허벅에 물을 지고 와서 먹던 시절, 집집마다 출입구 옆에 긴 의자를 만들어 놓아 등에 진 허벅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해 놓은 쉼팡이 공간나눔의 대표격이다. 그런데 외지자본들이 들어와 높은 건물들을 지으면서 제주의 전통인 공간나눔을 계승하긴 커녕, 일층부터 꽉꽉 채우고 높이 세워서 경관을 사유화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는 게 작금 제주의 현실이다.

건축물심의위원회에 참여했던 어떤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주 큰 호텔 심의가 들어왔어요. 가상해보니 그 건물이 서면 낮은 집들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이던 것이 사라져요. 그 길을 걷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아스라한 바다 대신 위압적인 콘크리트 장벽을 보며 걸어야 하는 건데 보통 답답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1층은 비워서 시야를 틔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도시가 삭막해지지 않고 머물고 싶은 곳이 된다, 외국의 선진적인 도시들은 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서너명의 위원이 제 의견에 동의해서 설계변경을 하기로 했는데, 다음 심의에 갔더니 어찌 된 일인지 원안이 다시 올라왔고, 그냥 통과되더라구요.”

가까운 예로 서귀포청사 별관 1층이 ‘쉼팡’으로 꾸며져 있는데 거대한 건물들 1층이 이렇게 거리 쉼팡으로 꾸며진다면 지나는 시민들의 숨통이 얼마나 트일 것인가. 또한 기둥만 있고 텅 비어 있는 1층 공간을 자연스러운 바깥 풍경들이 채우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일 것인가. 굳이 ‘안도 다다오’라는 건축가의 작품을 보러 섭지코지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을 위해 자기집 앞을 내놓는 이 쉼팡정신은 제주의 공동체 정신이 체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나와 남이 하나라는 이 공동체 정신이야말로 지금껏 제주를 먹여 살려온 힘이었고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힐링을 얻는 포인트이다.

나날이 깍쟁이 건물들만 늘어나는 가운데 '지역민과 하나 되고 싶다‘며 고급진 실내 공간을 기꺼이 나누는 하나은행 서귀포지점, 그대를 쉼팡요정으로 인증합니다.

오한숙희 / 여성학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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