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있는 풍경] 고정국 시인의 '비오는 날의 억새밭'
저는 피고인입니다.
오랜 침묵시위 행렬이 여기에 와 맺고
머리카락마다 비릿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몇 달 전부터 마을을 내려다보던 산들이
시름 속에 얼굴을 묻으며
가느다란 새 울음소리
빗줄기 사이로 흘려보냅니다.
어디 하나 고갤 드는 이 없고
1991년 늦가을에 하나 같이
무지몽매한 피고인의 모습입니다,
한사코 묻는 말에조차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 고정국 시 '비오는 날의 억새밭'
고정국 시인이 1991년 양용찬 열사가 제주도개발특별법을 막겠다며 산화하는 즈음에 남긴 시다.
시인은 비오는 날 억새꽃에 맺힌 물방울을 보면서 눈물을 떠올렸고, 새 울음소리에서 대자연의 신음을 들었을 게다.
시인은 "1991년 늦가을에 하나 같이/ 무지몽매한 피고인의 모습"이라고 고백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는 대규모 개발사업에 중독된 채 무지와 몽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개발특별법을 막아보겠다고 양용찬 열사가 산화한 지 26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올해도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도청 앞에는 제2공항을 막아보겠다며 중년의 촌부가 힘겹게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열사가 어릴 적 놀았을 신례리 이승이오름 인근에 억새꽃이 곱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