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사진으로보는 제주)

 

중산간 깊은 겨울 모두가 게을러지는 새벽, 어머니의 손이 홀로 분주하다. 조심스레 장작을 지피고 주전자에 물을 한 솥 올린다. 아궁이의 불이 와랑와랑 타오르고 부뚜막의 온기가 집 안으로 퍼져갈 즈음 겨울해가 기지개를 피며 느릿느릿 솟아오른다.

일찌감치 질게 지은 조밥을 식힌 후 솥단지에 담는다. 미지근한 물을 한바가지 붓고 큼지막한 주걱으로 부지런히 젓는다. 커다란 주걱이 지나는 자리마다 뱅글뱅글 물수제비가 피어난다. 어머니의 고단한 하품 사이 밥알이 풀어지며 끓어오른다. 동짓날 바지런히 준비한 골(엿기름)을 섞고 기다린다. 굽싹굽싹 졸다 보면 솥단지에 거품이 보글거린다. 엿물이 되어가고 있다. 엿물이 굳어 감주가 되고 졸아 들면 조청이 되는 셈이다. 어머니는 엿물이 완성되면 망사나 보자기를 이용해 고두밥을 조몰락거리며 물기를 짜낸다.

어머니 아버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조상님 때부터 곡물을 엿기름으로 발효시켜 조청을 만들었다. 먹을 것이 충분치 않던 시절, 귀한 당분이었다. 엿기름은 보리를 싹을 틔어 말린 맥아를 말한다. 맥주의 원료가 되는 바로 그 ‘맥아(麥芽)’이다. 이 맥아와 물을 섞어 적당한 온도에서 숙성시킨다. 자연에서 비롯한 천연 발효제이다.

드디어 꿩고기가 솥 안으로 들어간다. 적당히 삶아서 건진 후에 장조림 찢듯 먹기 좋게 찢어 식힌다. 그동안 엿물이 걸쭉해진다. 몽글몽글 덩어리가 생기면 식힌 꿩고기를 넣고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졸인다. 어느새 뉘엿뉘엿 산 너머로 해가 저문다. 어머니는 하루 꼬박 불 옆을 떠나지 못했다. 누구는 어린 시절 따뜻한 추억을 떠올리는 음식이요, 누구는 질색팔색할 엽기 먹거리, 꿩엿의 탄생이다.

제주도에는 예로부터 꿩이 많았다. 중산간 초지와 곶자왈의 잡풀 덤불 안에서 흔히 꿩을 볼 수 있었다. 육지 꿩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도록 몸집도 크고 색깔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지방이 적어 단백질 함유량이 많아 맛이 단백하다. 섬유소가 가늘어 위와 장에 부담을 주지 않고 소화 잘된다. 조청과 엿은 맥아당, 텍스트린(dextrin) 성분으로 복통에 좋고, 기침을 멎게 한다. 더욱이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저장음식이었다. 먹거리가 충분치 않던 시절, 겨울철 보양식에 꿩엿이 한 몫 단단히 했음이 분명하다.

돌아보면 호박엿, 강냉이엿, 무엿 등등 전국곳곳에 고장의 명물인 특색 있는 엿이 있었다. 조청은 우리 음식에 풍미와 맛을 끌어올린다. 한과나 약과의 맛을 좌지우지하는 훌륭한 식재료이다. 그러나 장날 엿장수 보기가 흔치 않은 오늘이다. '엿장수 맘대로'란 관용어에 주석이 필요해졌다.

일주일에 몇 번씩 아이들 손을 잡고 밀가루와 설탕이 범벅된 빵과 캔디를 사러 제과점에 간다. 훌륭한 재료와 조상의 지혜가 담긴 전통 간식들은 진작에 뒷방 신세로 밀려났다. 그래도 말이다. 칼바람 매서운 겨울이 오면, 그날의 기억이 아스라하다. 아랫목에 퍼질러 앉아 말랑말랑한 가래떡에 돌코롬한 꿩엿을 발라 입천장에 쩍쩍 들러붙도록 오물오물 씹던 그날. 그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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