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 /서귀포문화원문화대학장 ․ 제주언론인클럽상임부회장

  우리나라의 연호(年號)는 ‘서기’가 아닌 ‘단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우리는 줄곧 단기를 써왔다. 단기는 단군기원(紀元)을 말한다. 단기4281년 9월 25일 당시 제헌(制憲)국회가 단기를 공용연호로 하는 내용의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ㆍ공포하고 시행에 들어감으로써, 단기는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정식연호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기세대라고 불릴 만큼, 단기에 익숙해 있었다. ‘단기4281년 국민(초등)학교 입학(당시는 9월)’, ‘단기4290년 중학교 졸업(당시는 3월)’. 이처럼 모든 공식 문서에는 단기를 사용하였고, 한자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써서 檀紀로 표기하였다. 단기에서 2333년을 빼면 서력기원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의례껏 ‘檀’君이요, ‘檀’紀인줄로만 여겨왔다. 그런데 단군을,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기록한 고문헌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즉 고려 충렬왕(1275~1308)대에, 승려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에는 단군을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엮어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는 박달나무 단(檀)자, 檀君으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제왕운기 이후의 문헌에서는 모두 박달나무 단(檀)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壇君 ․ 檀君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단일화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단군왕검이 나라를 처음 열었음을 기리기 위해, 국경일로 개천절(開天節)을 정하여 해마다 경축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민족의 표상인 그 ‘단군’을 동일한 글자, 단일호칭으로 확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무지의 소치임을 자책하면서 고대사(古代史) 공부를 열심히 해보았다. 나름대로 많은 국사책과 자료를 뒤적였다. 사학자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는 시종일관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기재하고 있다. 김용섭 교수도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에서 ‘壇’君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20년대에 발행되던 동아일보 역시, 壇君으로 표기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 선생도 당시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壇君을 쓰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언론이면서도 1930년대의 조선일보는 단군을 박달나무 단(檀)자 ‘檀’君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나 자료가, 단군을 이렇다 할 해명 없이 ‘檀’君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다행히도 몇몇 책자에서는 간단하게나마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어 반가웠다. “단군을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를 썼는데, 그 이후의 기록에는 박달나무 단(檀)자로 바뀌어져 있다. 제단이나 박달나무 모두, 신성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단’이라는 글자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한국고대사 산책’>.” “단군을 삼국유사에서는 壇君으로, 제왕운기에서는 檀君으로 각각 다른 한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군이라는 명칭이 순수한 우리 고대어(古代語)여서, 한자로 표현할 때에는 그 소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지은이에 따라 다르게 쓸 수도 있었던 것이다<‘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

  어쨌든 단군을 국조(國祖)로, 민족의 상징으로 존숭(尊崇)하는 이상, 비록 음(音)은 같다고 할지라도 문자(文字)만은 통일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가(史家), 학자, 전문인들의 몫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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