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순 / 문학박사

2018년 올해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전인 1918년, 제주도 도순리 법정사에서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목적을 표방하며 도순 하원 월평 영남 대포 상예 서홍 법환 중문 회수 등지의 지역 주민 700여명이 참여한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 중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치며 조직한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항일운동이다.

제주도 도순리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법정사 신도들에게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닻에 해당하는 지역이므로 제주도에서 먼저 닻을 들어 올리는 항일운동을 시작해야 전국적으로 그 기운이 왕성하게 번져나간다며 제주도가 항일운동을 선도할 것을 역설했다. 이에 서울에서의 3.1운동보다 한 해 먼저 제주도 법정사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 지역 마을주민들의 참여로 항일운동이 거행되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 등 법정사 승려들은 1914년경부터의 법정사 활동에서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설명하며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거사 실행 6개월여 전부터는 군대조직과 같은 거사를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선봉대장 중군대장 후군대장을 임명해두고 이 사이에 선봉을 맡을 사람들을 정해 놓아 당일의 참여주민을 이끌게 하는 조직이었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자들은 거사 목적이 국권회복임을 천명하며 독립을 위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겠다는 요지의 격문을 작성해 그 의지를 드러냈고 곤봉, 깃발 등을 사전에 제작해 두었고 화승총도 준비했다.

이러한 계획적인 사전 준비 끝에 1918년 10월 7일 새벽, 거사가 실행되었다. 법정사 예불을 핑계로 법정사에 모였던 34명의 선봉대가 도순리 법정사를 출발해 하원 월평 등을 거쳐 중문에 이르렀을 때 동조해 참여한 주민이 700여명이었다. 34명의 선봉대는 마을에서 참여주민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선봉대장 강창규의 지휘 아래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고, 일본 전통복장을 입고 지나가던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했다. 참여 주민들을 이끈 선봉대장 강창규와 김상언의 인솔로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고 집기를 부수었다.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 기마 순사대의 공격으로 참여자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어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1918년의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미년 3·1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항일운동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들에 대한 탄압은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과 고문 등이 행해졌다.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에게는 징역 10년형을 구형하는 등 참여자 46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 전 가혹한 조사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있었고 수감 중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신체적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도 많았고 해방 될 때까지 일제의 감시로 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기도 했으며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을 두려워했다. 7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해 국권회복을 표방하며 중문경찰서를 불 지르고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모습을 결행한 법정사 항일운동이 제주도 전체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다. 그런 까닭에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검거자들을 재빨리 목포로 이송했다. 당시 제주도에도 제주지청 검사분국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포로 이송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서 조사했다.

일제는 경찰의 수사단계를 건너뛰고 검사분국에서 바로 사건 처리했고,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내내 법정사 항일운동을 혹세무민의 난이었다고 의식화하는 작업도 시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을 엄중하게 인식했고 항일운동의 움직임이 파급되는 것을 막아보려 노력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혹독한 고초 속에서 험난한 인생을 살다갔다. 어찌 이들 선열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는 2018년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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