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역사의 뒤안길 - 강정동 97세 윤경노 옹(2)

마을의 역사를 지켜온 노익장, 어르신들. 그분들을 찾아나선다. 서귀포시 강정통물로 90(강정동) 주소지에 대를 이어 살아온 올해 97세 윤경노 옹. 강정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인 분이다. 100세 가까이 된 연세에도 어린 시절부터 청장년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심지어 마주쳤던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시다. 살아온 날들의 기록은 윤 옹이 펴낸 『鄕土 江汀』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강정마을뿐만 아니라 서귀포시, 제주도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윤경노 어르신은 4.3과 관련한 기억부터 풀어 놓으셨다.
강정마을에 들어선 해군기지 앞에서는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우리 마을도 4.3사건 피해가 꽤 컸지. 1948년 음력 10월 16일이었어. 이날은 중문지서 축성 공사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동원된 날이었는데, 일을 마친 해질 무렵에 마을에 돌아와 보니 주민 열 명이 군‧경에 총살 당했다고 들었어. 이날부터는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네. 들녘이서 밤낮으로 군‧경덜 동향을 엿보면서 살기 시작한 것이었지. 주민들이 우왕좌왕했었으니까.

그렇게되니까 마을 원로, 유지들이 경찰하고 교섭에 나서게 되었는데, 마을 전 주민이 백기를 들고 마을 향사로 모이라고 했어. 흑백을 가린 후에 집에서 잠잘 수 있도록 안전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지. 1948년 음력 10월 21일 오전에 주민 모두가 집결해서 열을 지어 앉았지. 경찰들은 그 자리에서 29명을 지명해 연행해 갔지. 그 사름들, 왕대왓 지경 서울집밧 가운데 열 지어놓고 군‧경 수십명이 팡, 팡, 팡, 발포하여 전부 총살시켜버렸어. 그 가운데 천행으로 한 사람이 살아나서 자기네 집으로 가서 숨어 있었는데 발각되어서 다시 처형했지.

1948년 음력 11월 16일은 강정민보단원 130여명이 토벌대로 동원된 날이었지. 도순지서 직원이 지휘했는데 영남동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어. 토벌이 끝나고 돌아오는데 하물서동산에 들어설 무렵에 마을 안에서 총성이 들리는 것이었어. ‘오늘은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고?’ 하면서 민보단 사무실(현 강정초등학교 관사)까지 달려갔어. 가서 보니까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0명이 총살당했다는 말을 들었어. 아뜩한 마음이 들대.

메모루 학살이 일어난 이날, 난 민보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법환경찰주둔소 강운서 경사가 나한테 “수고했습니다” 하면서 악수를 청하대. 그러면서 손을 좀 내놓아보라며 수갑을 덜컥 채웠다가 풀고, 풀었다가 채우고 하면서 말방앗간(현재 고남천씨 집 서쪽)으로 오라는 거야. 방앗간으로 가니까 나한테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 감정을 상하게 할만한 일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어. 난 “이제 나이가 27세이고 촌살림에 누구하고 싸운 적도 없고 감정 가질 사람도 없습니다” 대답했지.

그때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났어. 스물 한 살 때 우리 집 난간의 지까다비(튼튼한 천과 바닥은 고무로 만들어진 작업화)를 벗어서 놓아두었는데 없어진 적이 있었는데, 수소문하던 중의 어도리서 추수하러 왔던 사람들 신발도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거였지. 나중에 알고보니까 고 무엇이라고 하는 형제가 가져간 것을 알게 되어서 돌려받았었다고 얘기했지. 그 말을 들은 강 경사는 “당신 대단한 사람이다. 수고하세요” 했어. 그러면서 그냥 헤어지긴 했는데, 돌아서면서 고씨 형제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생각하며 한 가지 제주 속담이 생각났지. ‘도적은 심지 말곡 다울리라’(도둑은 잡지 말고 내쫓아라)는 말이야.   

정리 안창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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