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목 자리가시횟집에서 맛본 제주 자연을 닯은 물회

자리물회. 괴장되지 않은 색깔에 구수한 향, 제주자연을 닮았다.
관광객이 아니라 제주사람 입에 맞춘 음식이다.
섬은 덤이다.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한 날, 사무실을 나와 북타임 서점을 방문했다. 서점에 마련된 테이블에 노트북과 책을 올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힐 요령이었다.

그런데 서점 임기수 형이 점심이나 함께 하자며 끌고 나왔다. 그렇게 차를 몰고 간 곳이 보목포구다. 포구 주변을 가득 채운 차들을 보고서야 벌써 자리물회의 시즌이 돌아왔음을 짐작했다.

기수 형은 보목리 자리물회 식당 가운데 유독 ‘자리가시횟집’ 식당만을 찾는다고 했다. 보목리에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대부분 식당이 관광객들의 입맛에 음식을 맞췄다는 것. 그나마 된장으로 양념을 친 자리가시횟집 물회가 제맛이란다.

옛날부터 자리돔은 제주사람들이 즐겨먹는 생선이었다. 구이로도 먹과 물회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많이 잡힐 때는 집집마다 젓갈을 담아서 먹었다.

허남춘 교수와 허영선 소장 등이 쓴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 이야기’에는 자리가 제주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된 배경으로 조선조 인조에서 조시대까지 이어진 200여 년 동안의 출륙금지령을 들고 있다.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주의 어업활동이 연근해로 축소됐고, 연근해에서 주로 잡혔던 생선이 자리돔이었다는 것. 그럴듯한 해석이다.

책은 자리물회를 만드는 ‘비법’도 소개하고 있다.

‘자리물회를 만들 때 뼈째 먹기 때문에 뼈를 좀 부드럽게 하는 방법으로 식초를 미리 넣는다. 그러면 뼈가 삭는 효과가 있으므로 자리 뼈가 부드러워져서 뼈째 먹을 수 있다. 자리물회 양념은 된장으로 한다. 향신료 ’제피‘도 빠지지 않는다. 제피나무는 집집이 있을 정도로 물회에 넣는 향신료로 애용되었다.’

텍스트에 비추어 보면 기수 형은 가장 기본적인 래시피를 따르는 식당을 찾는 것이다.

물회를 주문하니 고등어구이가 먼저 나왔다. 왕소금을 친후 불에 구운 고등어향이 구수하다. 고등어 살점을 다 뜯어먹을 때쯤 나온 자리물회. 제주섬의 색깔처럼 화려하지도 과장되지도 않다. 된장으로 양념을 하거나, 부러 색을 더하지 않은 게 참으로 소박하다.

기수 형이 한마디를 남겼다.

“식초를 치지 않은 물회는 물회가 아니고, 자리물회와 함께 마신 소주는 술이 아니다.”

이게 뭔 말인가? 물회에 식초가 필수라는 건 앞에 텍스트를 통해 의미를 파악하겠는데, 뒷 부분은 아무래도 애주가의 괴변인 듯 했다. 그래도 얻어먹는 주제에 반론은 무슨.

자리돔을 잘게 썰어서 채소와 섞었기 때문에 한 숫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자연의 갖은 향이 들어오는 기분이다. 고추장이나 설탕으로 애써 인공적인 맛을 더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이 끝까지 살아 몸으로 전해진다. 뼈째 씹어도 전혀 부담이 없을 정도로 부드럽다.

내가 밥을 다 먹을 때쯤 술 한 병을 비운 형이 “세상에 쉬운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사실 50대 가장에게 닥친 일들 가운데 쉽고 만만한 게 있겠나? 그래도 구수하고 부드러운 자리물회 한 그릇을 위안삼아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식당 사장님에게 물었더니, 요즘 자리돔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어제 하루 동안 이곳 어부들이 잡은 자리가 모두 20킬로그램 밖에 안됐다고 했다. 사러오는 사람이 많은데도 자리돔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이러다가 자리물회도 방어진 고래고기처럼 귀한 몸이 되는 건 아닐까?

자리물회 한 사발에 행복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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