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택 / 제주대 철학과 교수

“가족들과 온전히 5~6일 가량을 함께 보낸 적이 드물다. 세 자녀의 어린 시절은 빠르게 저물 것이다. 이들이 10대일 때 곁에 있어주고 싶다.” 미국 하원의장 폴 라이언이 지난주에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한 말이다. 그가 10선 하원의원인데다 나이가 비교적 젊은 48세이기에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정계 입문한 이후에 태어난 세 자녀의 나이는 지금 각 16세, 14세, 13세라고 한다.

그는 16살 때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를 여읜 뒤 사회보장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중고시절엔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돌보면서 알바를 했으며, 대학에 다닐 땐 웨이터, 헬스클럽 트레이너 등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부와 명예와 권력보다 가정을 선택한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나에게도 남다른 가정사가 있다. 1901년생 아버님과 1920년생 어머님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 덕분에 만나셔서 뒤늦게 4남매를 두셨는데, 아버님 59세, 어머님 40세 되던 해에 나를 낳으셨다. 손위 누님과 형, 그리고 손아래 동생이 있다. 아버님은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아버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게 아쉽다.

홀로 되신 어머님은 소아마비를 앓던 나를 뒤치다꺼리 하면서, 손위 누님과 형, 그리고 손아래 동생을 키우느라 열 손가락 지문이 다 닳으셨다. 우리 사남매는 어려서부터 제 살길을 찾아 각자도생했기에 함께 살지를 못했다. 어머님과 살던 때도 새벽별 보면서 일 나가시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셨기에 따뜻한 밥을 함께 먹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어머님과 관련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다섯 살 때부터 걷지 못하는 나를 구완하느라 삼년 간 다른 자녀들을 내팽개친 채 동분서주하셨고, 예닐곱 살 때는 잠자리에서 한글 자모를 읊어주셨고, 가난하지만 꿈을 잃지 말라는 창가를 불러주시곤 했다. 어머님 정성 덕분에 나는 삼년을 기어만 다니다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걸음마를 시작하였고, 2학년 말이 되어서야 한글을 겨우 깨우칠 수 있었다.

열한 살이 되자 형편상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 하여 나 홀로 남영호를 타고 부산으로 떠나야 했다. 어머님께선 타지에선 늘 정직해야 된다고 어린 나에게 신신당부하셨다. 어린 시절 삼년간의 부산 생활은 우물 안의 개구리를 면하게 해주었다. 중학시절엔 어머님께선 식당 주방일을 하시다 병을 얻었고, 고교시절엔 병약한 몸으로 농사를 지으셨으며, 대학시절엔 나만 읽을 수 있는 맞춤법과 제주사투리로 편지를 보내오시곤 하셨다.

자식은 부모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성격과 태도까지 무섭도록 닮는다. 부모 모습은 자식에게 대물림되어 평생 지속되는 것 같다. 자식은 부모의 삶 그 자체를 본받는다. 부모가 맨날 텔레비전 프로를 보면서 자식에게 책 많이 읽어라, 열심히 공부해라 말 해봐도 헛일이다.

자식이 열심히, 떳떳하게, 정의롭게 살기 바란다면, 부모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어머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봤던 어머님의 모습은 지금도 내 성격과 태도 속에 살아있다. 가진 것 없지만 늘 당당하셨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시면서 사셨던 어머님은 아직도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것 같다.

나에게도 두 남매 자녀가 있다. 부모님과 함께 한 기억이 많지 않기에 자녀와 더 많은 추억을 남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보건말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걸었다. 하느라 했지만 자녀들이 사춘기 시절엔 소통불능에 가까워서 많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식들은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자식들이 부모를 위로하고 걱정한다. 그들도 이제 철이 들은 것 같다. 자립적으로 당당하게 옳은 길을 가려는 자식들을 보면서 내가 크게 잘못 살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교학상장은 사제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간에도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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