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탐방기5] 말레이시아 역사도시 말라카

말라카 네덜란드 광장.

기다리는 말라카 여행이 시작됐다. 앞서 밝혔듯 개인적으로 말레이시아 탐방의 가장 큰 의의가 말라카 방문이었다.

쿠알라룸푸르 도심을 빠져나온 버스가 달리는 도로 양쪽에는 팜나무 농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팜나무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인데, 영국이 19세기 후반에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도입해 말레이시아에 심었다. 지금은 고무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농업을 지탱하는 축으로 자리 잡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라카까지 버스로 약 2시간 30분. 버스는 말라카 중심 네덜란드 광장에 도착했다. 금요일인데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광장을 채웠다.

한때 84개 언어가 사용되던 국제도시

말레이시아는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다. 게다다 이 도시에서는 말레이인과 중국인, 유럽인,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말레이 반도에 최초로 국가가 등장한 것은 1400년경이다. 말라카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길목(말라카해협)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동남아 무역의 중심이었다. 아시아 서부인 인도양 해역과 동부인 중국계 해역의 산물이 만나는 장소였다. 말라카왕국이 아랍계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이슬람은 이 나라의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후 명나라 정화 장군이 이끄는 원정대가 이곳에 들른 이후 중국인들의 정착이 시작됐다. 이후 페르시아인과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류쿠인 등 아시아 전역에서 상인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한때 말라카 항구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84개였다니 아시아 무역에서 차지하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말라카는 서양 침략자들에게 노출됐다. 최초로 말라카를 정복한 자들은 포르투갈인들이다. 포르투갈인들은 15세기, 인도양 해역에 진출해 후추 등 향신료 거래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고급 향신료와 중국산 비단, 도자기 등이 거의 중국과 동남아 방면에서 오는 것을 보고 동쪽으로 눈독을 들였다.

그래서 당시 탁월한 입지조건을 갖춘 말라카를 탐낸 끝에 1511년, 선대 포격을 활용해 말라카를 정복했다.

16세기 유럽인들이 침략 시작

포루투갈인들은 1521년에 말라카 언덕 위에 교회당을 지었다. 처음에는 ‘Our lady of the hill’이라 불렀는데, 후에 네델란드인이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hurch)로 개칭했다. 네덜란드인들은 포루투갈인들이 세운 교회를 귀족들의 묘지로 사용했고, 후에 동방 선교를 위해 몸 바친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죽었을 때, 그의 유해를 인도로 옮기기 전 이곳에 잠시 보관했다고 전한다. 세인트 폴 성당 앞에는 자비에르의 동상이 있는데,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간 형상이다.

말라카 언덕에서 멀리 바다를 내려다본 모습. 말라카해협이다.

말라카 언덕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바다가 보인다. 말라카해협이다. 20대 중반이었던 90년대에 배를 몰고 이 해협을 여러 차례 지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 3개 나라가 바다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 좁은 해협은 한 나라의 국권이 배타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공해다.

공권력의 사각지대인데다가 수많은 배들이 지나기 때문에, 국제 해적들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총으로 무장한 해적들이 상선에 침입해 돈이나 화물을 탈취하는 일들이 빈번했던 시기다.

후에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라카 해협의 해적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 때는 이미 국제적 협력으로 이 일대 해적들은 활동을 멈춘 시기였다. 제주해군기지가 처음부터 명분과 원칙이 없이 추진된 사업이었음을 보여준다.

말라카에는 세인트 폴 성당 외에 산티아고 요새(Porta De Santiago)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세인트 폴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동쪽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과거 요새의 정문이 있다. 한때는 난공불락의 성채로 그 위용을 과시했으나 포르투갈이 네덜란드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성채는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정문만이 남았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말라카를 차지한 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1605년, 아시아에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고급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암보이나 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이후, 1619년에 지금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요새를 설립하고 이름을 바타비아라고 명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해 1641년에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말라카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말에 고급향신료 무역을 거의 독점하는데 성공했다.

뱃사람들은 겉으로는 용맹해도 항해 도중에 항상 불안에 떠는 이들이다. 바다에 나가면 늘 풍랑에 시달리는데다가 과거에는 항해장비가 시원치 않아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고통을 위로받을 곳이 필요하다.

위험 속에서 위로가 필요했던 정복자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성당을 묘지로 사용하는 대신 자신들을 위해 그리스도 교회(Chrisr Church)를 지금의 네덜란드 광장에 세웠다. 1753이라는 건축연도가 선명하게 남앗다. 붉은색 그리스도 교회는 중세 유럽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hurch).
포르투갈의 요새가 대부분 파괴되고 정문만 남았다.

그런데 세계사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18세기 세계 최대 무역규모를 자랑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99년 회사 청산의 절차에 들어갔다. 네덜란드는 1780년 12월 영국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네덜란드 상선들이 우세한 영국해군에 나포되면서 수익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쇄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1795년, 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지배권을 모두 영국에게 위임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 착수해 페낭에 영국 상관을 설치하고, 말라카와 바타비아를 접수했다. 영국은 말라카 일대를 기반으로 향료 무역권을 장악하고, 중국에 아편 수출 기반을 다졌다.

네덜란드 광장에서 김광균의 시 ‘외인촌’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우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우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촌락의 시계는 아니어도 그리스도 교회 광장에는 시계탑과 영국식 분수가 유럽식 정취를 더한다. 분수는 영국 식민지 시절,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을 기념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말라카해협에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말라카강가에 붉은색 건물들의 행렬이 눈에 띤다.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이 이곳을 기지로 중개무역을 할 때 상품보관 창고로 사용했던 건물들이다.

말라카에 유럽인들의 흔적 말고도 중국의 오래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원이 있다. 청훈텡 사원(Cheng hoon teng Temple)으로, 중국인들이 1646년, 정화의 원정을 기념해 세웠다고 전한다.

중국인들도 안식처를 만들다

명나라 영락제는 1405년에 환관 정화에게 선단을 이끌고 중국의 남쪽으로 원정을 나갈 것을 명했다. 정화는 1405~1433년, 29년 동안 7회에 걸쳐 대규모해상활동을 펼쳐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30여 나라를 원정했다.

당시 정화의 원정대는 이곳 말라카도 방문해 보급기자를 만들었다. 이후 중국이들의 방문과 정착이 이어졌고, 자신들의 정신적 구심으로 사원을 건축했다. 사원은 유교와 불교, 도교 등을 아우른다. 관음보살과 어민들의 수호신인 조상을 모시고 있는데 모든 건축 재료를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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