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의녀 홍윤애문화제, 30일 11시 유수암 묘역에서 열린다

지난해 열렸던 제5회 홍윤애문화제 현장.

목사의 호령에 따라 여자는 동헌 처마에 거꾸로 매달렸다. 꼭 사냥해 온 꿩을 매단 형국이 되었다. 입과 코에서 피거품이 솟는데도 매질은 계속 되었다. 그 여린 몸에 무려 장 70대, 그녀는 마침내 축 늘어져버렸다. 그리고는 영 깨어나지 못했다.

오성찬 선생의 소설 <추사 김정희>(도서출판 큰산) 중에 나오는 홍윤애의 죽음을 묘사한 대목이다. 혹독한 매질과 고문에도 죽음으로 사랑을 지켜낸 홍윤애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

의녀홍윤애기념사업회가 오는 30일 오전 11시, 유수암 묘역에서 제6회 홍윤애 문화제를 개최한다.

의녀 홍윤애의 사랑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제향과 더불어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마련됐다. 김순이 의녀홍윤애기념사업회 대표가 초헌관을 김봉오 제주문화원 원장이 아헌관을 박병직 밀양박씨종친회장이 종헌관을 맡아 제향을 올린다. 김원순 제주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집례를 맡는다.

시낭송가 문선희씨와 연극배우 이병훈씨가 시극 ‘부활하라, 사랑!’을 공연한다. 그리고 무용가 박연술씨가 진혼무 ‘영세불망(永世不忘)’을 선보인다. 그리고 나종원씨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진혼곡 동심초를 연주한다. 서란영씨가 펜풀룻 선율로 ‘그대 그리고 나’를 들려준다.

의녀 홍윤애(洪允愛)는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 연간에 생존했던 제주여인이다. 그녀는 반역죄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 온 젊은 선비 조정철(趙貞喆)을 뒷바라지 해주다가 그 인품을 존경하게 되고 마침내는 사랑하게 된다. 조성철은 정조시해 사건에 연류됐던 대역죄인이었다.

당시 제주목사 김시구는 권력을 이용해 조정철에게 저지르지도 않은 혐의를 뒤집어씌워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목사는 홍윤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조정철이 유형수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지, 임금이나 조정대신들에 대한 비방을 했는지 여부를 캐물었다. 하지만 홍윤애는 시종일관 "청소하고, 빨래하며 잔일을 거들어주었을 뿐"이라고만 답했며 버티다 끝내는 목숨을 잃었다. 1781년(정조 5년) 음력 5월 15일의 일이다.

홍윤애의 죽음은 역사성이 매우 강렬한 사건이었다. 증거도 없이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 처참한 고문으로 살육한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으로 번졌다. 제주목사·제주판관·대정현감·정의현감이 한꺼번에 모두 갈리고 안핵어사가 파견돼 와 석 달 열흘 동안 철저한 진상조사를 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하여 조정철은 억울한 음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사건은 홍윤애를 통하여 제주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기질을 널리 선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홍윤애의 고결한 정신과 거룩한 행위는 제주여성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조명되어 마땅하다.

홍윤애의 이야기를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찾아내 빛을 보게 한 데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순만 선생(전 제주문화원장)의 노력과 정성이 컸다. 또한 양주조씨대종회의 조원환 회장의 적극적인 호응도 감동적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9일, 양주조씨 문중회에서는 구천을 떠돌던 홍윤애의 영혼을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에 봉안해 해마다 10월에는 제를 지내고 있다.

조정철이 29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제주목사로 자청해서 돌아와 홍윤애의 묘를 정비하고 통곡하며 헌정한 묘갈명(墓碣銘)과 추모시는 ‘유배문학의 꽃’으로 인정된다.

고통과 슬픔에 대한 성찰 없이 인생에 대한 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랑과 정의가 황금만능주의에 밀쳐져 가는 이 시대에 의녀 홍윤애가 죽음으로 일궈낸 사랑의 가치와 정의에 대한 기개야 말로 우리가 되살려야할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홍윤애는 김만덕과 더불어 제주여인의 표상이 되기에 마땅한 여성이다. 그녀는 정의의 화신이며 불멸의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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