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윤성근의 '내가 사랑한 첫 문장'(흐름출판, 2015)

책의 표지.

스무 살 무렵,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고 심장이 두근거린 경험이 있다. 중심 대목은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지금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는 첫 대목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마지막 구절이 남긴 전율은 여태 가슴에서 지울 수 없다.

소설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이상의 <날개>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시작해서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의 기묘한 대칭은 아직까지도 감흥의 흔적으로 남았다.

유성근의 ‘내가 사랑한 첫 문장’(흐름출판, 2015)은 소설을 성공으로 이끈 매력적인 첫 문장들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연애에서나 취업 면접에서 첫 인상이 중요하듯, 소설에서는 첫 문장이 승부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책은 이상의 <날개>와 싸르트르의 <구토>, 릴케의 <말테의 수기>, 박상룡의 <죽음의 한 연구> 등을 포함해 23개 작품들의 첫 문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첫 문장만을 소개하지 않는다.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사연과 감흥, 작가와 작품 전반에 대한 짤막한 소개도 담았다.

저자는 프란츠 카프가의 <변신>의 첫 대목을 맨 앞에 소개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그로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는 고등학교 시절, 헌책방 구석에서 <변신>의 첫 대목을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 마력에 빠져 작품을 독일어 원서로 읽을 계획을 세웠는데, 사전 찾아가며 다 읽었더니 고등학교 3년이 다 지나갔단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독신 남성에게 틀림없이 아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인정된 진리다.’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 문장에 대해 작품 전체의 내용을 잘 요약한 ‘오만’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문장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저자가 이 책을 읽은 사연도 ‘오만’하다. 직장 동료가 회사 회직 자리에서 여직원들에게 ‘야만과 편견’이란 책을 읽었다고 허세를 떨었고, 여직원들이 제법 감동스런 표정으로 경청했다는 것. 그런데 저자는 얼떨결에 자신도 읽었노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확인했더니 그런 제목의 책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점에서 대신 찾은 책이 바로 <오만과 편견>이었다고 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 구절은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라고 시작한다.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기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혁명과 사랑, 청춘은 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영국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하게 살아야하는가, 프랑스로 돌아가 자신에게 헌신했던 이들을 도울 것인가. 숭고한 선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다.

저자는 까다로운 관문을 무난하게 통과해 작품을 명작의 대열로 안내한 첫 문장들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라 칭송한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그 선물을 얻어내기 위해 긴장을 풀지 않고 원고지 위해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사투를 동반한다.

갑자기 기사를 너무 쉽게 써서 내놓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회 2015 우수콘텐츠 선정작에 올랐다. 

가격은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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