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일손 영령 유족들이 합동위령제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을 통해 연행된 뒤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백조일손 영령 및 행불영령 제68주기 합동위령제’가 17일 오전 10시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에서 봉행됐다.

백조일손유족회와 섯알오름사건행불유족회가 주최하고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 후원으로 열인 이날 위령제에는 허법률 서귀포시부시장과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오임종 제주4·3희생자유족회 상임부회장, 문대림 전 청와대비서관 등과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해 고인들의 넋을 위로했다. 

위령제는 양천익 전 유족회장의 초혼문 낭독을 시작으로 초혼례, 헌화와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

섯알오름 집단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16일과 8월20일에 예비검속을 통해 연행된 218명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계엄군에 의해 집단 총살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요시찰 인물 전원을 구금할 것(예비검속)을 전국 경찰서체 지시한다. 이에따라 제주도 전역에서 1200여 명이 검속되고, 모슬포 관내에서 347명이 검속됐다.

서울이 점령되자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예비검속자를 처형하기 시작했다. 모슬포 관내 347명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학살당했다. 같은 해 8월 20일(칠월 칠석) 새벽 2시 63명(한림 어협창고 및 각 지서 구금자)이 학살되고, 이어 새벽 5시에는 모슬포절간 고구마 창고에 구금 중이던 132명이 학살당하고 암매장 됐다. 이들이 학살돼 암매장됐던 장소가 섯알오름이다. 유족 300여 명이 이날 시신 수습 중 군경이 유족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수습했던 시신은 다시 암매장 됐다. 이후 1956년 3월까지 민간이 출입이 강력히 통제됐다.

희생자 132명 중 농업 종사자가 77명으로 절반 이상이었으며, 이장 8명, 청년단장 8명, 이서기 2명 등과 나머지 학생, 교사, 공무원, 회사원 등이었다. 나이별로 살펴보면 20세 이하 14명을 비롯해 21~25세 42명 26~30세 29명, 31~35세 20명 36~40세 16명, 41~45세 4명, 46~50세 2명, 51~55세 1명, 56세 이상 3명 등이다.

유족들이 시신을 처음 수습한 것은 1956년 3월 30일이다. 만벵듸 유족들이 심야를 틈타 62위 시신을 수습해 현재의 공동묘역인 금악리 2754번지에 안장시켰다. 같은해 4월 28일 다시 시신 수습을 시도했으나 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민관합의에 따라 같은해 5월 18일 149위의 시신을 수습했다.  

백조일손 묘역.

6년 가까이 흙탕물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을 발굴했으나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지할 수 있었던 17위는 유족에게 인도되고, 나머지 시신은 칠성판 위에 머리 하나에 등뼈, 팔, 다리뼈 등을 적당히 맞춰 132구의 시신을 구성해 현 묘역에 안장해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했다. '백조일손'은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 두 분이 한날, 한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의미다. 유족들은 이후 정성을 모아 1959년 5월 8일 백조일손 묘역에 위령비를 건립했다.

4.19의거 후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관한 결의안이 가결된 후 진상조사에 대한 기대감기 컸으나,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권이 집권하며 진상조사는 중단되고 유족들은 연좌제의 사슬에 묶였다. 군사정권은 군경이 자행한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지시했으며, 1961년 6월 15일 묘비가 파괴되고, 경찰의 강압에 못 이긴 유족들 중 일부는 밤을 틈타 유해를 옮기기도 했다. 

〈백조일손〉이라는 말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한참 후인 1989년 4월 들어서다. 오성찬씨가 '샘이 깊은 물'3월호에 백조일손 진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어서 같은 해 6월 박서동씨가 월간 '제주관광'에 백조일손 묘역  사진과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1993년 7월 백조일손 유족회가 창립되고 8월 23일 제주4.3민간인희생자유족회 주최로 백조일손 영령 위령비가 건립되고 제1회 합동 위령제가 모역에서 봉행됐다. 

국가를 상대로 2010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15년 6월 24일에서야 정부 패소로 결말이 났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