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한금순의 <제주법정사항일운동>

책의 일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7일, 제주도민 700여명이 일본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의로 서귀포시 도순리 법정악 계곡 법정사에 모였다.

승려 김연일과 강창규 방동화 등 항일운동의 주역들은 법정사에서 새벽 산길을 타고 내려와 도순리와 하원리, 월평리, 중문리, 영남리,대포리 등의 주민 700여명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다.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이다.

당시 주도자들은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더 무거운 형을 받고 수형생활을 할 정도로 강한 탄압을 받았다. 재판 전에 가혹한 조사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람도 생겼고, 수감중 옥사하는 이도 있었다.

불교연구가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한금순 박사가 제주법정사항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학술서 ‘제주법정사항일운동’(서귀포신문사 출판)을 발간했다. 책은 저자의 석사학위논문 ‘1918년 제주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제주대 사학과, 2006년)을 재구성했다. 일제 문서와 불타버린 법정사의 터, 거사가 일어났던 마을들의 현재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이 함께 실렸다.

▲항일운동 근거지로서의 법정사

법정사는 관음사의 안봉려관과 김석윤 등이 1911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현재 지명으로는, 한라산국립공원 내 서귀포시 자연휴양림 인근에 위치했다. 법정사는 항일운동 후에 불태워지고 터는 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에 있다.

그리고 김석윤과 강창규는 전라북도 위봉사에서 출가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한 후 제주도에 들어와 관음사에서 함께 활동했다. 김석윤은 1909년 제주의병항쟁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주도자들은 1914년부터 법정사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조선의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당시 제주도내 사찰의 대외 활동이 미미했다. 제주도는 관음사(1908년)와 법정사가 창건되면서 불교의 교세가 재건되는 상황이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1914년 이후로 예불을 통해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법정사는 창건 이후 8년여 기간 동안 지역민들에게 신뢰를 주고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일제의 기록을 보면,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거사 소식을 사전에 알고 법정사에 가서 자발적으로 의거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제주도의 상황

저자는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이 일본의 국권침탈과 수탈이라는 배경에서 벌어진 거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일제는 1883년에 일본 어민의 조선에서의 어업을 인정받은 이후, 수산물을 남획하고 가축을 약탈했으며 도민에게 폭력을 일삼았다. 그리고 1913년부터 도내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국유지를 대량 조성한 후 이를 일본인들에게 불하했다. 그리고 1918년에 제주도에 14개 순사주재소를 설치하는 등 수탈을 위한 물리력을 충원했다.

▲거사의 목적

저자는 ‘정구용 판결문’과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 일제가 작성한 문서들을 분석한 후, 당시 거사의 목적이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고 단언한다.

에를 들면, ‘정구용 판결문’의 ‘원심 공판 경위서’에는 ‘법정사 주지 김연일이 “제주도내에서 일본인을 쫓아내 원래의 한국시대로 회복할 것이나 조력하시오”라고 말했다’는 진술 대목이 있다. 또, 일본 극비문서인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는 김연일과 관련해 “왜노는 우리 조선을 병탄할 뿐만 아니라 병합 후에는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한다.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을 도외로 내쫓아야 한다”고 기록됐다.

법정사 주도세력들이 일제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고통당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국권회복을 목표로 거사를 일으킨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있다.

▲거사의 왜곡

하지만 일제는 법정사항일운동을 사교도의 민중선동 운동으로 왜곡하고 거사의 범위를 축소했다. <매일신보>의 보도가 대표적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에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자를 700명으로 기술한 후, 1923년에는 400명으로, 1938년에는 약 300명으로 점차적으로 축소 보도했다. 그리고 1923년에 이 사건을 독립운동으로 보도했다가, 1938년에는 무극대교도라는 사교도들의 반란으로 왜곡해 그 의미를 폄훼했다.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이 일어날 시기로부터 멀어질수록 독립운동의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법정사항일운동은 이후 오래도록 ‘보천교의 난’이라는 왜곡된 이미지가 씌워진 채로 남아있다.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의 주도세력과 참가자

운동의 주도세력은 제주도 출신 승려인 강창규와 방동화, 또 외부에서 제주도로 들어와 법정사 주지로 거사를 지휘한 김연일과 법정사 거주 승려들로 구성됐다.

당시 주도세력 가운데 법정사에 거주했던 인물들은 김연일과 강민수, 정구용, 김인수, 김용충, 장임호 등 6명이다. 그리고 법정사에 거주하지 않았지만 주도세력으로 활동한 이는 박주석과 최태유가 있다.

이들이 주도했고, 법정사 인근 마을에서 700명이 거사에 참가했다. 도민들은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 이재수의 난 그리고 1909년 제주의병항쟁 등을 경험하며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워왔다. 그리고 일본인의 수탈에 대한 불만이 법정사항일운동 거사에 동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주도자들이 당한 고초

법정사항일운동에 대한 편결은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9년 2월 4일에 내려졌다. 주요 인물 가운데 김연일은 징역 10년 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징역 4년 1월로 감형됐다. 그리고 강창규는 징역 8년을 판결 받고 징역 6년으로 감형됐고, 방동화는 징역 6년을 판결받고 징역 3년으로 감형됐다. 장구용은 징역 3년을, 박주석은 징역 7년을 각각 판결 받았는데, 각각 징역 1년 6월과 징역 3년 6월로 각각 감형됐다.

주지 김연일과 더불어 강창규의 행적을 주목할 만하다. 강창규는 거사당일 선봉대장으로 700명 참여자들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빠져나와 4년 3개월 동안 도피생활 끝에 상효리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가담자 가운데 옥사한 이들도 있다. 강수오는 강창규의 동생으로 기록됐는데 1918년 12월 27일에 재판도 받기 전 수감상태에서 옥사했다. 일제가 강창규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강수오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강춘근은 1919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일제는 강창규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강춘근에게도 모진 고문을 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주석은 1919년 2월 4일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목포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21년 7월 24일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김봉화는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19년 12월 1일에 대전감옥에서 사망했다.

▲제주법정사항일운동을 기억하는 일

저자는 제주법정사항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에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며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고난을 불사했던 제주법정사항일운동 참여자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일이고, 그 신념 덕분에 잘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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