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윤용택의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궁리, 2018)

책의 표지.

석주명은 세계적 나비박사로 열려졌지만,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쓴 국제주의자이자 조선 생물학을 주창하며 국학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자, 제주도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제주도 총서를 발간해 제주학의 초석을 놓은 지역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석주명은 한국의 르네상스 지식인인자 최초의 융복합 지식인이라 부를 만하다.

팔방미인 지식인으로서 학문의 융복합을 실천했던 석주명의 생애를 조명하기 위한 책이 출간됐다.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지은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궁리, 2018)이다.

석주명은 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에 놓였던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13세이던 1921년에 평양의 대표적 민족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듬해 학교를 중퇴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의 스승인 원홍구의 영향으로 1926년에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는 석주명 학문의 뿌리라 부를 만하다.

이 학교에서 채집하고 표본을 제작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석주명에게 나비연구를, 시게마쓰 다츠이치로 교수는 에스페란토 공부를 권했다.

그는 졸업한 후 함흥영생고보와 개성 송도고보 등에서 교직생활을 했는데, 송도교보 재직기간 동안 연구의 크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송도교보 스나이더 교장은 재직하던 동안은 물론이고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석주명의 나비연구를 지원했다. 미국 기독교계 인맥을 총 동원해 석주명의 연구를 후원했고 영국 왕립학회와 석주명의 만남을 주선했다. 게다가 당시 송도고보는 현미경과 대형 실험대 등을 갖출 정도로 연구 여건이 좋았고, 전인교육을 강조하며 특별활동에도 힘쓰는 학풍이 있었다.

석주명은 이 기간 학생들을 조별로 나눠 전국의 유명한 산을 두로 탐사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고향의 나비를 채집하는 작업을 방학과제로 냈다. 이런 일들이 결실을 맺어 당시 송도교보에는 나비표본 60만 마리를 갖출 정도였다.

석주명의 나비채집과 표본제작 기술은 탁월했다. 그 덕분에 하버드대학 비교생물학관, 미국자연사박물관, 뉴욕의 아메리칸박물관, 워싱턴의 소미소니언연구소 등 여러 박물관과 학술단체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연구결과들을 각 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연구비 지원도 받고 외국 전문가들과 교류하는 행운도 누렸다.

석주명은 채집한 나비들의 종들을 확인해 일본학자들이 다른 종으로 명명한 나비들이 사실은 같은 종이라는 걸 밝혀냈다. 수많은 개체변이를 관찰해 종종이명을 가리는 연구에 매진했는데, 한 가지 종에 대한 동종이명을 가리는데 10만 마리 이상의 나비의 모양과 형태, 날개의 길이 등을 일일이 조사했다. 이런 초인적인 연구를 거쳐 동종이명 921개 가운데 884개를 정리했다.

석주명은 1942년에 송도중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경성제국대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소속인 개성의 ‘생약연구소’ 촉탁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마고원 등 국내 벽지들을 대상으로 나비채집에 나섰다.

석주명의 생전 모습.

석주명은 나비박사로서 독보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제주지역에서는 최초의 제주학자로도 인정을 받은다.

그는 1936년에 7월에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제주를 찾아 한 달을 머무른 적이 있다. 그는 한라산과 여러 오름들을 답사하며 58종의 나비를 채집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주의 독특한 문화에 매료됐고 7년 후에 제주를 다시 찾았다.

그는 1943년 4월에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 부임한 후 2년 동안 제주도 방언과 전설, 문화 등을 연구했다. 그는 해방직전 2년을 제주에서 보낸 후 45년 8월에 개성에 있는 생약연구소 본소로 복귀했다. 그리고 1948년 2월에 다시 제주를 찾아 섬을 일주했다.

석주명은 제주도에 근무하던 시절 수집한 자료를 모아 서울신문사출판국을 통해 여섯 권의 총서로 출간할 계획이었다. 그 가운데 <제주도 방언집>(1947년)과 <제주도의 생명조사서>(1949년), <제주도 문헌집>(1949년)만 생전에 출간됐다.

제주도 총서 유고들.

그런데 석주명이 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던 중 신원불명의 청년들에게 피격되어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석주명의 누이 석주선이 전쟁의 와중에도 오빠의 유고를 간직한 덕에 <제주도 수필>(1968년)과 <제주도 곤충상>(1970)이 훗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 윤용택 교수는 서문에 이병철의 <석주명 평전>을 읽고 그를 사모한 지 25년이라며 “오늘날 석주명 선생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이도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살아서 전설이 되었고 죽어서 신화가 되었다. 그가 천재성과 성실성을 겸비한데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깊었고 인간과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았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