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신문이 만난 사람]이규길 농업회사법인제주홍암가(주) 대표

이규길 대표.

고령의 사업가는 시종일관 신념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간 삶의 이력과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익혔던 노하우 등을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풀었다.

이규길 농업회사법인제주홍암가(주) 대표를 7일에 만났다. 이 대표가 세계 3대 인명사전 가운데 하나인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에 최근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보리나 감귤 등 제주 농산물을 이용해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상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이 대표를 만나서 인명사전에 등재된 경사를 축하했다. 그리고 인명사전에 등재된 과정을 물었는데, 이 대표는 “내가 농업이론을 근간으로 발명특허를 냈다”고 답했다.

보리가 내린 선물, 국제특허

이 대표는 지난 보리의 생장을 연구하던 중 보리가 겨울을 나지 않으면 낱알이 영글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우석대학교 연구팀과 공동으로 그 원인 규명에 나섰다. 그리고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겨울을 나는 과정에서 12가지 아미노산 생성량이 크게 증가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대표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공기상실을 이용해 춘화처리로 곡물의 기능성을 높이는 방법을 정리하고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유럽, 일본에서까지 국제특허를 획득했다.

이규길 대표는 2018년 대한민국 인물대상과 ‘2018-2019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에 등재됐다.

농촌진흥청 과계자도 이 대표가 작물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보리의 생장 과정에 대해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근원적인 원리를 탐색하는 과정을 보고 “박사학위가 있는 전공자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 농민이 접근하는 게 대단하다”고 극찬했다. 이 대표는 그런데 “내 학력은 중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해방 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선친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동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형편이 못돼 중학교 1학년을 중퇴했다가 그래도 졸업장이 필요할 것 같아 3학년에 복학해 졸업장은 받았다.

가난을 피해 떠난 인제에서 군수직을 제안받기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가난 속에 보낸 후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고 ‘도피처’로 전국에서 가장 오지라 꼽히는 강원도 인제를 선택했다. 그런데 인제에서 임차농으로 농사를 시작하며 농업에 눈을 떴다. 70년대에 나무기둥으로 비닐하우스를 짓고 머스크메론을 재배하면서 지역에서 뛰어난 농사꾼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영농 사례발표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이 대표는 “당시에 인제 군수 눈에 들어 면장직이나 농협 조합장직을 제안받기도 했는데 내가 사양했다”라며 “그분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생각을 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농대 출신이라고, 어떤 이들은 신학대 출신이라고 했는데, 사실 난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이 대표는 80년대 한우파동을 겪으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상황에서 300만원 넘던 소 한 마리 값이 100만원으로 떨어졌다. 결국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사업이 망하자 아픈 몸은 더 나빠지고 일조차 할 수 없게 됐다.

필리핀에서 유명인사가 됐지만 다시 악화돤 건강

자연식으로 몸을 추슬렀다. 그런데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마침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필리핀에 파견할 농업기술 고문을 찾고 있었다. 현지에서 의식주를 제공하고 가족을 동반할 수도 있다는 조건이었다. 이 대표는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리핀에 양파가 귀했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적색양파의 수요는 매우 많았는데, 환경이 맞지 않아 양파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이 대표는 양파농업에 관심을 갖고 관련 논문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육묘기간에 지베렐린 호르몬을 투여하면 영양생장이 활성화되면서 충실한 양파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늘도 귀하고 비쌌다. 그곳에서 마늘을 심으면 알이 작은데다 쪽이 20개나 생겨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상 15도씨에서 20일간 처리하면 휴면이 타파되면서 상품성 높은 마늘이 생겼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필리핀 현지인들은 이 대표를 과학자나 전문가라는 의미로 사이언티스트(scientist)라고 불렀다. 현지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그런데 다시 병이 도졌다. 여러 환경이 한국과 달랐고, 식재료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귀국하고 여러 곳을 찾다가 제주에 정착하기로 했다. 1998년의 일이다. 표선에 빈집을 얻어 10년 가까이 허투로 세월을 보냈다. 이 대표는 “젊을 적에 친구 따라 제주를 와본 적이 있는데 이국적이고 순박한 이미지가 있어서 제주를 찾았는데, 제주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건강 회복하려 발효식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업으로 이어져

제주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시간을 쏟았다. 보리와 현미로 발효식품을 만들어 먹으면서 몸이 많이 회복되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발효식품과 관련된 정보들을 회원들과 공유했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다이어트에 관심이 있는 카페회원들의 요청으로 건강식품을 만들어 나누다보니 카페 회원이 어느새 3만명이 넘었다. 이들의 요청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게 오늘의 홍암가에 이르렀다.

이 대표는 이와 관련해 “현대인들은 병이 많은데 그 결정적인 원인이 음식에 있다”라며 “과거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가장 장수하는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수명이 짧은 지역에 속한다. 미군들이 가져온 음식문화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육식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데, 육식 못지않게 탄수화물, 특히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는 식사에 문제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보리나 현미는 밀‧보리 보다 포도당을 적게 만들기 때문에 건강에 도움이 된다며 특히 보리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