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신경림 시인이 가려뽑은 산문집 <뭉클>(책읽는섬, 2017)

책의 표지.

신경림 시인은 <산읍기행〉〈시제(詩祭)〉〈농무(農舞)〉 등의 시집으로 정체된 농촌의 현실과 핍박받는 농민의 애환을 노래했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반으로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신 시인은 경험에 비추어 시인을 키우는 게 비단 좋은 시의 감동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산문, 특히 성직자나 화가, 음악가 등 문학인이 아닌 사람들의 산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 역시 적지 않다고 한다.

<뭉클>(책읽는섬, 2017년>은 신경림 시인이 인간적인 글을 가려 뽑은 산문집이다. 오래전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도 감동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책을 엮는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책에 등장하는 산문은 총 40편이다. 이상과 정지용, 이어령, 김기림, 이광수, 류시화, 박목월, 임화, 박인환, 문익환, 이효석, 최인호, 권정생, 김용택 등 이름을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문인들의 글이 대부분인데, 이중섭과 손석희처럼 문인이 아닌 유명인의 글도 있다.

눈길 가는 대로 이중섭의 ‘서로에게 불행한 결과를 낳을 따름이요’ 편을 펼쳤다. 화가 이중섭이 1954년 1월에 동경에 있는 아내 이남덕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한 편이다. 글의 한 대목이다.

‘육체노동이라도 열심히 할 테요. 처음에는 페인트가게 시다바리라도 괜찮소. 예술과 가족과의 아름다운 생활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고가 되어 있소 …그대들과 같이 생활만 할 수 있다면 제주도 돼지보다 못한 걸 먹더라도 힘을 낼 수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초소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여건만 우선적으로 생각해보아요. 돼지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발휘해서 빨리 힘을 내지 않으면 태형이 태성이 대향이 너무 불쌍하잖소.’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자녀들 곁에서 창작에 몰두할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드러난다. 제주도 돼지보다 못한 삶을 각오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필자가 가장 감명을 받은 글은 권정생 선생의 ‘목생 형님’ 편이다. 권정생 선쟁의 둘째 형님에 대한 글이다.

권 선생의 어머니는 일본에 간 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기 위해 1936년에 자식들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 당시 권정생 선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슬하에는 5남매가 있었는데, 여권은 네 명 몫밖에 나오지 않아 자식 두 명은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열아홉 살 장남은 친구와 함께 만주로 건너간 후 일본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고, 열다섯 살 차남(목생)은 외할머니 밑에 남기로 했다.

그런데 차남 목생형님은 가난한 외할머니 밑에서 고독과 주림을 견디지 못해 2년 만에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권정생 선생은 이때부터 자장가 대신에 어머니의 구슬픈 타령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이 생전 만나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둘째 형님의 외로운 2년을 상상하는 대목은 정말 큰 울림이다.

‘때로는 산봉우리 높이높이 올라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불렀을 게다. 아버지도 불렀을 게다. 동생들 이름도 불렀을 게다. “을생아아!” “귀분아아!” “또분아아!” 목이 터저라고 부르면서 울었을 게다. 외딴 산속에서 친구가 없는 목생 형님은 나무와 더욱 친해졌지. 그중에서도 늘 푸른 소나무를 친구처럼 사랑했을 게다 … 세 살 아래인 동생 을생이와 싸운 것을 생각하다간 가슴이 아프도록 후회도 했겠지. 누이동생 귀분이에게 할미꽃 족두리 만들어 씌워주던 일, 또분이를 업어주고 코 닦아주던 일도 생각했겠지.’

손석희의 ‘햇빛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이후 각인된 햇빛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을 소환하는 글이다.

첫 번째 기억은 세살 때쯤 신작로 포플러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빛에 대한 것이다. 세상에 대한 첫 기억이 가까스로 걸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기억은 일곱 살 늦여름 필동(서울시 중구)의 골목집에 전세살이를 시작하는 날 푸른 하늘에 해바라기 꽃잎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기억은 열두 살의 초겨을 싸늘한 한옥 방에 빛바랜 창호지에 여과된 후 방을 채우던 햇살에 대한 것이다.

‘햇빛과도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밝음으로, 또한 감내할 수 있는 우울함으로. 그것이 나의 어릴 적 소망이었다. 중간쯤 와 되돌아본 나의 삶이 내가 소망했던 것과는 이만치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 해도 나는 내 바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늦깎이 삶에 대한 치열함으로, 나는 어릴 적 햇빛에 대한 기억에서 얻은 소망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가슴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뭉클하다’고 한다. 정말 책에 실린 40편 가운데 뭉클하지 않았던 글이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감동을 불러오는 산문들, 신경림 시인의 선택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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