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고등학교 개교에 얽힌 사연②

서귀고등학교 초창기 건물. 교문도 현판도 없이 목판에 교명을 세운 게 전부였다.(사진은 서귀포고등학교 자료실)

서귀고등학교 설립 당시, 부임한 교사는 윤세흠과 노상준, 강용소 등 3명이었다. 교장 자격이 없던 김공천 선생은 교장 직무대리로 부임했다.

윤세흠 선생은 수학 담당이었는데 교무주임을 맡았고 노상준 선생은 영어가 전공인데 연구주임을 맡았다, 강영소 선생은 국어 담당인데 학생주임을 맡았다. 박성관 선생이 서귀중과 서귀고에 겸임 발령돼 체육을 가르쳤다.

국어와 영어, 수학, 체육 등 과목을 전담할 교사들은 확보가 됐는데, 나머지 과목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교사들은 각각 전공과 상관없이 한 과목씩을 추가로 맡았다. 노상준 선생의 경우는 영어와 더불어 독일어도 가르쳤다.

개교 후에 1년이 지나니 교실 세 개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1년간의 더부살이를 끝내고 이사를 갔다. 학생들이 서귀중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성을 머리에 이고 고등학교 건물로 옮겼다. 그리고 새 학교에서 수업을 하던 중에 건축업자가 불쑥 찾아와 교실 입구에 목을 박았다.

건축비를 못 받았다며 건축비를 지불할 때까지 교실 출입을 막겠다고 협박했다. 서귀고등학교 설립추진위원회가 제 역할을 다했다며 손을 거의 놓은 상황이었는데, 밀린 공사비 30여만 원이 학교의 발목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교사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시작했다. 주민들이 1000원, 2000원씩 돈을 보태줬는데, 놀랍게도 강세철 의원이 거금 10만 원을 불쑥 내밀었다. 그렇게 밀린 공사비를 갚고 나서야 교실 통행을 막았던 못도 모두 제거했다.

이렇듯 여건이 어려웠지만 교사 세 명 사이에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학풍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엄격하게 다루기로 했다. 입학생 44명 가운데 졸업을 한 학생은 31명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은 강제 퇴학을 당한 경우다. 학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징계를 내렸다.

학부모와 주민들이 이에 대해 반발이 거세져 당시 교육청 현평수 학무과장이 학교를 방문해 교사와 주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도 있었다. 노상준 선생은 “당시 현평수 과장이 부모들을 만나면 ‘학칙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다루는 교사들은 참으로 못된 선생들이다’라고 말했지만, 교사들을 만나면 술을 사면서 ‘당신들 참 잘하고 있다. 이래야 학교가 바로 선다’고 격려했다”고 전했다.

한편, 노상준 선생은 “당시 우리가 학풍을 바로세우기 위해 학칙을 내세워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내쫓은 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참 잘못한 행동이었다. 후회가 드는데 당시에는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에피소드도 전했다. 어느 날 학생 3명이 무단으로 결석한 일이 있었다. 교사들이 학생들 자취방에 찾아갔더니 3명이 모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교사들은 논의 끝에 학생 3명을 한꺼번에 퇴학처분했다.

그리고 노상준 선생이 몇 년 후 서귀고등학교에 두 번째로 부임했는데, 형사 한 명이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 형사가 “선생님 덕분에 제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습니다”라며 “제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노상준 선생은 “당시 너희들을 퇴학시킨 일은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이렇게 잘 성장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한 후 “대신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라고 권했다. 결국 그 형사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교사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내 일등을 목표로 삼았다. 1회 입학생들이 3년 뒤에 11명이 예비고사를 치렀는데 10명이 합격했다. 합격률 91%를 기록했는데, 이는 전국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1회 졸업생 윤호영이 육군사관학교에, 고의경은 부산의대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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