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송주연 서귀포가정행복상담소 소장

제주의 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때입니다. 지난 주말, 스무 명 정도가 모여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상담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하여 모임에 가고 있는데, 웬걸! 평화로의 끝 제주시 초입에 숨 막힐 듯 자지러지게 피어난 벚꽃 가로수길을 달리며 새삼스레 처음인 듯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라는 소회에 잠깐 젖었습니다. 계절은 배반하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무에 그리 바쁜지 봄을 잠깐 잊고 있었나 봅니다. 벚꽃 축제가 진행되는 길을 걸으며 토요일 늦은 오후 이런저런 시름에 잠긴 마음을 떨구어 내고 봄의 기운을 담뿍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전히 느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곳은 사계절 여기기저 꽃들이 지천입니다. 방문객들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꽃밭을 조성해 놓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단연코 압권은 들에 산에 올레길에 예서제서 소담스럽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들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꽃임을 알 수 있는 쌀알만한 아이들부터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과 향기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면 ‘내 마음에 저장’이라는 문구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합니다. 굳이 핸드폰을 들이대며 찍지 않아도, 이름조차 모르지만 어떻습니까? 내 마음 속 화첩에 고이 담아두면 남부럽지 않은 부자인 것을요.

제주의 문화 변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 부류가 있다면서 첫 번째가 조선 시대 이곳으로 유배 온 귀족과 양반, 두 번째가 6·25때의 피난민들, 그리고 세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길댁 이효리라더군요.

제주에 유배 온 사람 중 대표적으로 광해군과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중 추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서예에 관심이 있어서일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고 3학년 때까지 8년간 줄곧 특활반으로 서예반을 택했던 이유는 단지 ‘붓글씨를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 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다녔던 여학교는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로 손꼽는 일중 김충현 선생께서 재단이사장으로 있었던 곳이어서 더 관심이 갔었고, 개인적으로 서예와 사군자 전시회 등을 많이 다녔드랬습니다. 이 곳 대정읍 추사기념관을 가서 강의도 듣고 전시물을 둘레둘레 보면서 잠깐 여학교 때 맘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 때문에 무고를 당하고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36대의 곤장을 맞고서 만신창이 몸으로 대정에서 위리안치되었지요. 추사는 헌종 6년(1840) 9월 4일 한양을 출발하여 24일간 이동하여 9월 28일 완도 이진포에서 배를 타서 그날 저녁 제주도 화북포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집니다. 

8년 3개월 동안 유배를 살며 그 유명한 세한도의 그림과 추사체가 완성되었고, 그 와중에도 추사는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썼다는데 그가 얼마나 책읽기를 좋아했는가는 자필로 쓴 장서목록을 통해 그 방대한 규모를 어림짐작 할 수 있으며, 목록에 따르면 장서의 종수로는 약 400을, 책 수로는 약 7000을 헤아린다 하니 입이 쩍 벌어질 밖에요. 

또한 한양서 보기 힘든 수선화가 제주의 들에 지천으로 핀 모습을 보고 추사가 감탄했다지요. 올레길을 걸으며 둘레둘레 수선화를 봅니다. 더군다나 이 곳의 수선화는 흰색 토종 수선화라니 꽃집의 노란 수선화와는 격이 완연히 다릅니다. 유배시절 추사는 수선화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였고, 여러 편의 수선화시가 전하며, 벗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수선화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지요.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네. 이곳에는 촌 동네마다 한 치나 한 자쯤의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같고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지…”(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제주의 벚꽃도 좋습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걸으며 수선화에게 눈길 한 번 슬그머니 줘보심은 어떨런지요.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