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고등학교 개교에 얽힌 사연③

제남일보가 '노천교육'이라는 제목을 통해 서귀고등학교의 열악한 교육여건을 풍자했다. 당시 교사와 학생들은 만평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이후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았다.(서귀고등학교 자료실 제공)

초창기 서귀고등학교에는 교실이 3개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문도 현판도 없었다. 나무널짝에 교명을 쓰고 나무기둥에 붙여놓은 게 전부였다. 게다가 운동장 가운데는 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제남일보>는 ‘노천교육’이라는 제목의 만평으로 서귀고등학교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풍자했다. 교문도 없는 상황에서 학교명을 적은 널짝은 뜯기기 직전인데, 지나가던 강아지가 공부하는 학생 앞에서 짖는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당시 만평이 교사와 학생들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 학생들은 이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계기로 삼았다. 서귀포고등학교는 자료실에 당시 만평을 사진으로 보존해 후배들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를 거울삼아 오늘에 성실을 기하도록 하고 있다.

교문과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학교 입구자리에 땅을 가진 사람이 땅을 팔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무원들은 토지주가 자신의 집을 건축하면서 토지경계선을 침범한 사실을 확인했다. 오광협 당시 읍장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토지주를 찾아가 대문을 지을 수 있도록 토지를 팔아주면 지적을 위반한 사실을 눈감아주겠다고 회유한 끝에 입구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토지매입 절차가 마무리되자 제일교포 김흥권 씨가 당시 서귀고등학교의 사정을 딱히 여겨5만 원을 쾌척했다. 당시 5만 원이면 교문을 제작하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초창기 서귀고의 모습.

그렇게 어렵사리 학교를 만든 후, 서귀고등학교 기성회는 학교를 제주도교육청에 기부 채납(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기반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사업 시행자로부터 재산을 무상으로 받아들이는 일) 형식으로 양도했다. 학교가 교육청 자산이 되고나니 교육청이 예산을 투입해 건물을 2층으로 증축했다. 학교의 틀이 정상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

교사는 보통 한 학교에 4년 길면 5년을 근무하던 시절이었는데 초대 교사 3명은 서귀고에 연속 7년을 근무했다. 학교가 자리를 잡고 학년 당 2학급 이상이 되자 교육청에서 교사들을 다른 학교로 발령했다.

노상준 선생은 “1회 졸업생이 3학년이 될 무렵인데 뉴질랜드 연수 기회가 왔다. 제주도가 문교부에 추천해서 기회가 온 건데 영어 교사가 나 한명 뿐이어서 차마 학생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라며 “우리 세 명은 청춘을 서귀고등학교에 바쳤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오광협 전 시장은 “당시 서귀포는 모두 농사를 짓고 가옥의 90%는 초가였다. 너무나 낙후된 환경 속에서도 선배 유지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후진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역민들이 스스로 땅을 구입해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유치한 곳은 서귀포 외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광협 전 시장은 서귀고등학교가 현 삼아아파트 자리(동홍동 201번지)에서 서귀포의료원 뒤편(동홍동 1460-6번지)으로 이전하게 되는 과정까지 증언했다.

당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알지만 구 교정의 운동장은 한글 니은(ㄴ) 자 모양이었다. 교육청이 모퉁이 땅을 매입해 운동장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려고 해도, 인근 과수원 주인이 좀체 땅을 팔려하지 않았다.

이에 강달훈 당시 교장이 1980년대 들어 학교 이설을 추진하겠다며 오광협 시장을 찾아 협조를 요청했다. 오광협 시장은 72년에 공직에서 퇴임해 자연인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학교 개교과정에 깊이 개입했고 오랜 공직생활의 경륜을 갖춘 점 등을 감안해 강 교장은 오 전 시장을 찾았다.

오 전 시장은 학교 이설 추진위원장을 맡고, 고봉식 교육감을 수없이 방문해 학교 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봉식 교육감은 서귀고등학교 부지를 팔면 이설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대학교가 78년도에 제주시로 이설된 후, 대학부지 일부가 비어있었다. 제주도가 저 땅을 공매하면 개인에게 돌아갈 상황이었다. 오광협 시장은 “시민들이 정성을 모아 만들어진 땅이니 다시 시민들이 차지하는 게 적합하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이설을 추진해서 성공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