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송주연 서귀포가정행복상담소 소장

가파도 청보리길.(사진은 장태욱 기자)

지난 토요일, 친하게 지내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 가파도 청보리축제 가는 것 어때?"라면서요. 냉큼 가겠다면서 약속을 정하고 둘의 약속에 친한 후배 또한 끼어들면서 일행이 셋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상담소 선생님 한 분과 사회복지 실습생 한 분이 바람에 넘실대는 청보리밭을 찍은 동영상을 단톡방에 올리면서 "히야! 멋있는데" 감탄을 하면서 본 기억 때문에 기어코 청보리를 보고야 말리라라는 마음으로 축제 막바지에 신이수동항에서 배를 탔습니다. 아아, 그 때는 몰랐지요. 보리가 패면 황금색이 된다는 것을요. 초록이 넘실대는 가파도를 기대하고 선착장에 내렸는데, 그랬는데...그 곳은 봄 속의 만추, 황금보리의 들판이었습니다. 게다가 끝물인지라 군데군데 수확한 밭은 이 빠진 것 모양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마저 자아냈지요. 때 아닌 봄 속의 만추를 만끽하고 돌아오는 배를 타면서 ‘내년에는 기어코 푸른 보리밭 장관을 꼭 보고야 말리라...’하면서 벼른 기억을 이사로 인하여 뒷정리로 경황없이 두어 주를 보내고서는 언니와의 통화로 빛바랜 그러나 선명한 작년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미세먼지로 산방산이 뿌옇게 보이는 일요일 늦은 아침, 셋이서 의기투합하여 운진항으로 향했습니다. 첫 기대에 대한 배반(?)때문인지 청보리라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기대감은 곱절로 커진 상황이어서 그런지 항구를 돌아들면서 눈앞에 펼쳐진 가파도는 그야말로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게다가 군데군데 보랏빛 유채는 르느와르(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몽환적으로 쉼표를 찍고 있었지요. 바람도 아랑곳 않고 섬을 군데군데 쏘다니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다가 앞서 가던 언니가 “아이디어 좋네”하면서 장갑을 주워 올리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목장갑 속에는 다육식물이 한 포기씩 심어져 돌담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습니다. 간단하고 친환경적인 화분인 셈인 거지요. ‘손이 참 많이 갔겠구나’하는 생각도 잠시, 자전거를 타고 앞서갔던 후배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도 연신 “정말 좋다, 정말 좋은걸!”하면서 아이처럼 신났습니다.

파아란 하늘과 숨 막힐 듯한 바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까지 지난 한 주 동안 심란했던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딱 좋은 그런 하루를 만끽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는 ‘놀멍, 쉬멍, 걸으멍’이란 올레 구호처럼 무작정 발길 가는대로 걷다보면 호흡이 가벼워짐을 느끼고 어느새 마음까지도 비워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담이란 소진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데 일에 대한 성취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사람과의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사소한 일에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거나, 혹은 아침에 일어나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기도 하다면 소진되었다는 것이고 그 때에 절실하고도 절절한 것이 쉼이며 쉼에 있어 걷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간 면접 상담에서 만났던 이들을 떠올려보면 게임중독으로 갈등하고 이혼을 생각하다가 ‘상담소에 가보자’는 아내의 권유로 함께 온 부부, 성추행 피해 학생과 보호자, ‘내가 이러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낫지 싶어요...’라고 하소연하던, 경찰서에서 연계되어 병원을 들렀다가 오게 된 가정폭력 피해자, 협의이혼이 재판이혼으로 가게 되었다는 아내 등등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상담을 오지만 그 중 너무 맞아서 임신인지도 모르고, 그마저 ‘태아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자신의 몸을 돌아볼 틈새가 겨우 생겨 ‘아차!’ 싶었다는 내담자는 구타로 그렇게 첫 아이를 유산하고 결혼 기간 내내 ‘이혼하고 싶은데 남편이 안 놔준다’면서 절망스런 얼굴로 돌아갔는데 그 분은 다시 상담을 올 겁니다. 아아, 제가 그 분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런지요.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걸을 겁니다. 가파도를 또다시 걷고, 올레 7코스도 걷고, 거문오름도 또 걸을 겁니다. 걷다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힘과 용기가 시금치 먹은 뽀빠이처럼 생겨납니다. 상담사인 저는 그래서 오늘도 또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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