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27일, 김익렬 연대장 묘소 방문해 추모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가 27일, 김익렬 연대장 묘소 방문해 그 뜻을 기렸다.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가 지난 27일, 김익열 연대장(중장 예편)의 묘소을 방문해 평화의 뜻을 기렸다.

4·3의 가해기관중 하나인 국방부가 지난 4월 2일 기관 차원에서 제주4․3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고, 3일 국방부 차관이 광화문 4·3추념 광장에서 헌화한 후 유가족들에게 세 번이나 사과했다. 이번 방문은 이런 화해 분위기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4․3 봉기가 발생하자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을 이끌어냈고, 이후 유고록으로 제주4․3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 김익열 중장의 기록이 국방부 사과의 계기가 됐다고 알려졌다.

4․3 봉기가 처음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무장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맨스필드 중령이 유해준 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제주도 민족청년단장 등에게 무장대 귀순작전의 책임자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났는지, 병에 걸렸다고도 하고, 연락도 없이 출장을 가버리기도 했다. 결국 김익렬 9연대장이 평화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4.28평화협상의 주역인 김달삼(좌)과 김익렬(우).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했다.

맨스필드의 요청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보낼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로 살포했고 48년 4월 28일 무장대 대표인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소속 9연대장 김익렬 중령 간에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당시 김 연대장은 어머니와 자녀를 볼모로 내놓기도 했다. 두 대표는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고 합의했다. 하지만 평화협상은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

김익열 연대장은 현역 군인으로써 48년 8월에 국제신문에 연재를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알렸고, 예편이후에는 유고록을 통해 그 진실을 밝히고자 헌신했다. 김 연대장은 1970년 초부터 1988년까지 유고록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00자 원고지 346장 분량에 당시 실상을 담았다.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현승은 사무국장은 “71년 전 집단학살의 비극을 막기 위해 본인의 생명과 어머니와 아들을 볼모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을 막기 위해 평화회담을 이루어 낸 4․28을 기념하고 김익열 연대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쳥년회원들이 묘소를 찾가 정신을 기리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추모사를 낭독한 문원섭 회장은 “참 군인의 고뇌와 함께, 4·3의 진실은 오랜 세월 뒷걸음치는 듯 했으나 3만여 영령들과 당신 같은 분들의 궤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 자주통일의 원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며 70여년 만에 진실 규명의 초석이 되어 준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번 묘역 제례는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가 주최하고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백경진 상임이사 및 관계자 참석)와 제주4·3평화재단(양조훈 이사장 및 관계자 참석)이 후원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김춘보 상임부회장과 강은택 사업부회장 등도 함께 하여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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