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송주연 서귀포가정행복상담소 소장

안개가 낀 섭섬.(사진은 장태욱 기자)

태풍이 부산에 상륙해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변해 세력이 약해졌다는 뉴스를 듣는 이곳은 육지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숨 막히는 열기에 오히려 닫아뒀던 창문도 열어 제칠만하고, 달궈진 흙 위에 찬물을 뿌린 비도 고맙기 그지없어 이 정도 눅눅함 쯤이야 기꺼이 감당할만한 산뜻한 기분의 아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태풍이 지나간 뒤 서귀포 집은 어떤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태풍이 온다는데 창문을 열어야할지 닫고 와야 할지 집을 나서면서 잠깐 망설였지요. 비가 창문으로 들이닥치는 것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곰팡이입니다. 제주살이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 중 곰팡이로 멀쩡한 옷 7벌을 버렸다는 둥,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 예상치 못한 곳에 곰팡이가 자리한다는 둥 곰팡이와 제주살이는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모피나 가죽옷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구두 안팎에 자리하는 그 놈들(?)때문에 신발장은 칸칸이 습기제거제와 나프탈렌이 점령한 지 오래입니다. 지난주에는 느닷없이 싱크대 문짝에 표시도 안 낸 듯 곰팡이가 살짝 묻어 있기에 기겁을 하면서 걸레질을 한 기억도 있고요. 나무로 된 블라인드에 살짝 살얼음처럼 끼어있는 것은 어쩌면 애교수준입니다. 정말이지 집안 곳곳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는 것이 곰팡이입니다. 그만큼 습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에 감기까지 걸린 상태에서 집안에서 만나는 이 녀석은 호흡기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제주에 여성폭력 관련 시설인 상담소와 쉼터, 여성긴급전화 1366과 다문화 등 16개 시설의 모임인 제주여성인권상담소·시설협의 첫 회의 참석 때 이야기입니다. 2017년 4월이었군요. “소장님은 제주에서 살아보니 어떤 게 제일 인상적이예요?”라는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이 툭 튀어나간 대답은 “안개와 비와 바람이요! 아아, 바람소리요!”라고 속사포처럼 대답이 튀어나가더군요. 불과 두어 달 살았던 때였거든요.

어느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하여 평화로를 지나는데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안개가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구나...’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뇌리에 자리 잡은 날이 있습니다. 마치도 휘장이 드리운 듯 운전석 시야는 물론이고 차 안의 거울이란 거울에 다 달라붙어 있던 안개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불과 2~3미터 앞도 허락하지 않는, 어둠보다도 더 무서웠던 안개는 엑셀을 밟을 수도,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게 만드는 얼음 그 자체였습니다. 운전 무용담쯤이야 과장하지 않고도 온갖 상황을 다 맞닥뜨려봤지만 단연코 모든 순위를 제치고 1위로 등극한 것이 그날 밤 안개 속의 평화로 운전이었습니다.

비는 비대로 어떤 날은 기분 좋게, 어떤 날은 또 다른 얼굴을 감추고 방문하는 손님 같기도 합니다. 일요일 밤 명상센터의 일정을 마치고 비자림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5·16도로나 노루가 왜 나와 있나 싶은 1100도로 역시 비와 만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비 오는 낭만에 취해있을 때가 아녀! 정신 차리고 운전해야 해...’하는 혼잣말을 뇌까리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주의 압권은 단연코 바람 그 중에서도 바람소리지요. 어떤 때는 효과음인가...싶게 의심스러우리만치 쌩쌩 거리기도 하고, 달려가는 말의 갈기가 연상되리만치 휘달리는 바람은 예가 광활한 벌판인가 착각하게도 만듭니다. 아아, 언제쯤 이 안개와 비와 바람소리에 기꺼이 젖어들 수 있을까요? 그때가 되면, 그때쯤이면 저는 제주사람이 다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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