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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절벽, 몽고인들 비명을 기억하는가?[섬의날 특집 6] 원제국 목호와 고려 최영의 최후 격전지
장태욱 | 승인 2019.09.24 10:54
범섬.(사진은 장태욱 기자)

문섬을 떠난 유람선은 범섬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배가 섬에 가까이 접근하자 섬에 부딪친 후 치솟는 물보라로 파도의 세기를 실감했다.

범섬은 문섬과 더불어 제주에서 파도 충격을 가장 앞장서서 받는다. 게다가 제주의 남서쪽에서 밀려오는 대만난류도 이 섬을 끊임없이 스치고 지난다.

범섬은 서귀포시 범환동 산1-1번지와 산2, 산3번지 등 세 필지로 구성된 본섬과 산4번지(서쪽 바위섬) 등으로 구성됐는데, 천연기념물 421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는다.

섬 근처에 당도했을 때, 파도가 섬 곳곳을 깎고 뚫은 흔적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폭이 1m도 되지 않은 좁고 길쭉한 주상절리들은 섬 전체를 빼곡하게 덥고 있다. 특히, 서쪽 부속섬은 파식작용에 의해 해식애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주상절리의 머리들이 해식애를 덮어 마치 갑옷의 표면과 같은 문양을 만들어냈다.

남쪽 동굴.(사진은 장태욱 기자)
쌍둥이 동굴.(사진은 장태욱 기자)

범섬의 구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파도가 절벽을 뚫고 만들어낸 4개의 해식동굴이다. 남동쪽 해안에 있는 동굴은 높이 20∼30m, 폭 40∼50m, 깊이 15∼20m로 가장 규모가 크다. 그리고 북동쪽 해안에는 높이 30m, 폭 5m, 깊이 15∼20m 정도로 규모가 비슷한 쌍둥이 굴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범섬(虎島)은 동서길이 440m, 남북길이 520m로서 남북방향으로 다소 긴 타원형이다. 서쪽으로 치우친 섬 정상부의 높이는 87.2m이다.

아직까지 정확한 지질연구 결과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지질학자들은 범섬이 주변 문섬(72만8000년), 섶섬(72만5000년)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조면암질 화산체일 것으로 추정한다.

섬은 사방에 걸쳐 비고 50m 이상의 해식애(절벽)가 나타나는 암석해안으로 둘러싸였다. 북쪽 해안의 해식애는 상대적으로 완만해 경사각은 65∼70°에 이르고 동쪽과 남쪽 해안의 해식애는 수직에 가깝다. 섬의 중앙부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져 사면을 이루고 동쪽 일대에는 평탄면이 나타난다. 섬은 서쪽이 동쪽보다 약간 높은데, 평탄면의 남동쪽에서는 흑갈색의 토양이 20㎝의 두께로 기반암을 덮고 있다.

남쪽 절벽, 목호들이 이곳으로 떨어졌을 것이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서쪽 부속섬 주상절리 상층 단면이 갑웃을 연상케 하는 무늬를 만들었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이 토양으로 인해 섬은 한때 경작지로 활용됐고 최근에는 염소 사육지로도 이용됐다. 섬의 중앙에는 이 같은 인위적인 간섭으로 숲이 형성되지 못해 참억새군락이 우점하고 있다. 섬의 정상부 남서쪽에는 사람이 거주하며 이용했던 소규모 용출수가 있다.

섬 정상부에 자생하는 대표적인 교목으로는 곰솔과 후박나무, 우묵사스레피 등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 김찬수 박사와 제주대학교 생명과학과 송관필 박사 등 연구자 5명은 범섬의 식생을 조사한 후 2005년에 학계에 논문 ‘제주도 범섬의 식물상’을 발표했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범섬에 자생하는 관속식물은 65과 140속 162종에 2변종이 더해져 총 164종이다. 그 중에는 양치점고사리와 쇠고비, 큰족제비고사리, 사다리고사리 중강아지풀, 줄, 송이고랭이, 꽃토론 등 미기록종이 다수 확인됐다.

양하와 미나리, 올리브, 큰사방오리 등 사람이 살았던 결과로 남은 식물들도 다수 확인됐다. 양하와 미나리는 식용으로, 올리브는 관상용으로 식재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큰사방오리는 국내 조림성공사례가 없는 작물인데, 식재자가 땔감용으로 심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범섬은 최영장군이 1374년에 몽고세력을 마지막으로 무찌른 전장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제주를 탈환하기 위해 몇 차례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당시 제주 목마장에서 말을 키우던 원의 목호들이 강경하게 저항했다.

범섬의 정상부. 과거에 이곳에 누군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숲이 형성되지 못했다.(사진은 임기수 독자위원 제공)

그러던 중 공민왕 23년(1374년)에 명에서는 탐라에 있는 말 2000필을 요구했다. 고려 조정이 이를 집행하려하자 목호들은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살해하는 등 극렬하게 저항했다. 공민왕은 문하찬성사 최영을 삼도도통사로 삼고 목호들을 완전 섬멸할 것을 명령했다. 최영은 전함 314척과 군사 2만5000여 명을 거느리고 동년 8월 28일 명월포로 상륙했다.

최영은 군사들을 독려해 명월촌에서부터 어름비오름, 붉은오름, 검은오름, 새별오름, 예래, 홍로 지경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공격하니 목호들은 견디지 못해 범섬으로 도망갔다.

최영 장군은 전부령 정용에게 경함(經艦) 40척으로 범섬을 포위케 하고 스스로 병사들을 인솔해 섬에 상륙 공격했다. 목호의 괴수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은 스스로 남쪽 벼랑으로 투신 자결하고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는 처자를 거느리고 투항했다. 이에 최영은 초고독불화, 관음보의 시체를 인양해 목을 베고 석질리필사는 처자와 함께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항복하니 목호의 난을 평정됐다. 이로서 제주에 대한 원의 100년 지배는 끝이 났다.

그런데 최영은 10월에 여러 장군과 함께 돌아오니 공민왕은 이미 죽었으므로 최영은 시체 앞에서 보고하고 목이 메어 통곡했다.

장태욱  taeuk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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