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날 특집 9] 가파도, 바람으로 납작해지고 바람으로 우뚝 솟은 섬

가파도 가는 뱃길.(사진은 장태욱 기자)
가파도의 누런 들녘.(사진은 장태욱 기자)

24일 오후 2시에 운진항에서 가파도행 도항선에 몸을 실었다. 가파도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가 4시 40분, 두 시간 남짓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봄에 청보리축제에 맞춰 가파도를 방문해본 건 여러 차례인데, 가을방문은 처음이다.

배가 가파도 상동항에 입항하는데, 파도가 끊임없이 선수를 덮쳤다. 배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부두에 버티고 서있는 커다란 굴삭기다. 포구가 낡아 방파제 기초 보수공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가파도는 서귀포시 대정읍에 속한 섬으로, 하모리에서 약 2.1km 떨어진 화산섬이다. 섬은 가오리와 같은 형상을 띠며, 둘레 약 4㎞, 총면적 0.84㎢에 이른다.

고기원과 박준범의 연구에 따르면, 가파도가 형성된 것은 약 82만4000년 전이다. 비슷한 시기에 점성이 높은 안산암질 마그마가 여러 곳에서 분출했는데, 산방산과 가파도, 문섬, 섶섬, 각수바위, 월라봉(대평리) 등은 비슷한 과정을 겪고 형성됐다.

섬이 생성될 당시는 해수면이 현재보다도 100미터 이상 낮아 이 일대는 육지였다. 산방산과 비슷한 종모양의 용암돔이었는데, 해수면이 상승하자 섬의 신세가 됐다. 이후 섬이 오래도록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방석처럼 납작해졌다.

이형상 목사가 1704년에 집필한 <남환박물>에는 가파도를 ‘개파도(盖波島)’라 하며 ‘수목이 없고 풀이 무성하여 사마장(私馬場)으로 하였다’고 기록됐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송악산.(사진은 장태욱 기자)

<증보 탐라지>에 따르면 제주목사였던 정언유가 1751년(영조 27), 섬에 검은 소를 키우는 목장을 설치해 소 50마리를 방목하게 했다. 이 섬에 소를 키우게 되자, 1840년(헌종 6년)에는 영국 함선 한 척이 섬에 정박하고 대포를 동원해 주민들을 위협하며 소를 약탈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1842년(헌종 8년)에 이르러 제주목사 이원조가 사람들로 하여금 섬에 들어와 밭을 일구고 세금을 내게 했더니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선총독부 농공상부가 1911년에 펴낸 <한국수산지>에는 ‘가파도에 인가 120호가 있다. 주민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지만 수산물이 풍부해 여가에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어선은 약 30척에 이른다. 일본인이 주로 전복과 해삼을 채취하는 곳으로 생산량이 많고 크기가 큰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면서도 ‘지금은 크게 감소했다. 잠수기업 업자 요시무리가 20여 년 간 이곳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했다.

조선은 1883년에 일본과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 어선들은 대거 조선 연안으로 몰려들었고 곳곳에서 조선인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 가파도와 모슬포 일대다. 이들은 현대식 잠수 장비를 동원해 제주의 어장을 싹쓸이했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침입해 양식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기까지 했다.

가파도에 벽화 그리기 사업이 진행 중이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청보리가 넘실대는 봄에는 섬이 온통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보리 수확이 끝나니 들녘은 누런 황갈색이다. 주민들은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등을 심어 꽃잔치를 열 계획이었는데, 9월과 10월에 몰아닥친 태풍으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가파리사무소에서 가파초등학교에 이르는 길은 섬 주민들의 삶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화공 3명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작업에 참여한 우선희 씨는 “가파도가 좋아서 자주 찾는데 마을에서 벽화 그리기 사업을 추진해서 참여한다”고 말했다. ▲가고픈 마을 가파도 ▲가장 제주다운 섬 가파도 ▲이야기의 섬 가파도 ▲청보리의 섬 가파도 ▲포토존 등 5개의 테마로 가파도의 특색 있는 거리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가파리사무소 인근에 사는 강모 씨(여, 56)를 만나 주민들의 삶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강 씨는 마을에서 가장 젊은 해녀인데, 바다에서 주로 소라를 채취한다. 강 씨는 “예날 일본에 수출이 잘 될 때는 소라 1kg 당 7000원씩도 받았는데, 지금은 3300원이다. 도(道)가 1000원을 보조해줘서 해녀들은 4300원을 받는다”라며 “도지사가 5000원 보장한다고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파도 바람을 상징하는 것들.(사진은 장태욱 기자)

가파초등학교 입구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감귤연구소가 이 학교 어린이의 소망을 실현하겠다는 뜻으로 지난 4월에 심은 귤나무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어린이는 ‘바다가 땅보다 넓은 가파도 귤은 바당 귤(바다귤) 맛이 날 것’이라고 동시(童詩)를 지었다. 감귤연구소 직원들이 가파도의 바람을 의식해 바람을 가릴 수 있도록 귤나무 주변으로 그물을 둘렀다. 

가파도는 바람이 끊이지 않는 섬이다. 30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밭담 어디엔가 여름철 무더위를 식힐 그늘이 필요할 텐데 그런 나무 하나도 없다.

마을 군데군데 무덤이 보인다. 무덤에는 모두 돌담으로 둘렀는데, 바람에 노출을 줄이기 위해 무덤 높이를 돌담보다 낮췄다. 섬의 북쪽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해안길을 따라 쌓아놓은 돌담이 보이는데, 돌들도 역시 오랜 세월 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져 몽글몽글하다.

80여만 년 자연의 역사가 있고, 척박한 환경과 싸우며 고단한 삶의 흔적을 간직한 섬인데, 최근에는 청보리와 청정에너지를 매개로 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도 성공했다. 가파도 풍력발전은 바람을 브랜드 상품으로 전환한 좋은 시도다.

명품섬에도 옥의 티가 있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그런데 명품섬에도 티가 있다. 주인이 떠난 가옥은 파손된 채 들고양이들의 서식지가 됐고, 오래된 경운기는 버려져 길가에 방치됐다. 누군가 길가에서 폐기물을 소각하다 주변의 나무들까지 불태운 자국이 상처처럼 남았다. 태풍에 부서진 정자는 별도의 조치도 없이 내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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