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타케 신부의 업적과 그 가치를 조명하는 심포지엄 7일 열려

심포지엄에서 문창우 주교가 기조강연을 하는 장면이다.(사진은 장태욱 기자)

에밀 타케 신부의 업적과 그 가치를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7일 오후 2시, 천주교 제주교구 동광성당 본당에서 열렸다. 천주교 제주교구와 (사)제주역사문화진흥원이 행사를 주최했고, 제주자치도와 서귀포성당이 후원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비롯해 시민 150여 명이 자리를 채웠다.

에밀 타케 신부(한국인 이름 민덕효, 1854~1933)는 제주도에 가장 먼저 미장온주를 도입해 제주도 감굴산업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런데 미장온주 도입은 타케 신부가 제주 재임기간에 남긴 수많은 업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타케 신부는 제주민란의 결과로 거의 몰락해가는 천주교의 교세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식물학계에는 제주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들을 채집해 세계 학계에 기록으로 남 남겼다.

문창우 비오 주교가 ‘제주와 함께 걸었던 선교사-에밀 타케’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에 나섰다.문창우 주교는 “타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8년 조선 땅에 입국해 1952년 선종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라며 “조선에서 보낸 55년, 대구에서 교육자로 31년을 지냈고, 제주도에서 선교사와 식물채집가로 13년을, 목포와 나주 지역을 포함해 섬들과 내륙의 수많은 공소에서 7년을, 부산과 진주, 마산에서 4년을 지냈다”라고 말했다.

타케 신부는 1902년 4월 마산포를 떠나 하논 본당 신부로 부임하며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제주도 천주교는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에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등을 겪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문창우 주교는 “타케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만신창이가 된 하논성당을 서홍동 홍로성당으로 이전해 새로운 판을 만들었다”라며 “대학살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혈맥이 꽉 막힌 고정관념과 편견을 걷어내며 제주민의 마음은 서서히 열렸다”라고 말했다.

박찬식 박사는 ‘에밀타케 신부의 제주도 사목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섰다. 박찬식 박사는 타케 신분가 부임할 당시까지도 지역사회와 천교교도, 그리고 일본 어민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며 대표적인 사건으로 1902년에 발생한 양시중 사건을 들었다.

하논성당 교인 박재순이 예촌사람 양시중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친일 인사인 송시백은 이를 핑게로 일본 어민을 데리고 무기를 들고 하논성당을 습격했던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타케 신부는 박재순에게 엄한 벌을 내렸고, 양시중에게는 부서진 탕건 값으로 4냥을 변상했다.

박찬식 박사는 다케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신을 근거로 “타케 신부가 부임할 당시 하논마을에는 11가구 밖에 없었고, 성당은 논에서 10미터 거리에 불과해 습기가 많아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라며 “결국 1902년 7월 본당을 홍로로 옮겼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폐쇄적 공간인 하논에서 열린 공간인 홍로로 이전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선교에서 문화적응과 포용의 선교로 선교방침을 전환해 천주교의 복구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김찬수 소장.(사진은 장태욱 기자)

김찬수 (사)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이 ‘에밀 타케 신부의 식물학 업적과 제주 식물의 가치 전승방향’을 주제로 두 번째 주제발표에 나섰다.

김찬수 소장은 “분류학을 공부하면서 제주도 식물의 분류 기원을 찾다보니 타케 신부의 이름이 자주 나와 관심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 후 “워싱턴 DC 포토맥 강변에 왕벚나무가 장관을 이루는데, 이 벚나무가 타케 신부가 보낸 벚나무가 자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에는 1000년 전부터 벚나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1900년도에 갑자기 일본 동경 우에노공원에 크고 화려한 벚나무가 들어온 것을 확인됐는데, 이 벚나무의 자생과 관련해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김찬수 소장은 타케 신부가 1908년 4월 14일 관음사 뒷산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확인하고 가지를 유럽으로 보냈는데, 베를린 대학 케네 교수가 이를 일본에 있는 벚나무와 같은 종임을 확인해 왕벚나무의 자생지기 제주도임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찬수 소장은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국적을 지난 연구자들이 제주의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경쟁하거나 협력했던 점도 흥미롭게 전했다.

제주의 식물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05년 일본인 학자들이다. 이후 1906년 포우리 신부가 연구를 시작했고, 타케 신부는 포우리 신부의 영향으로 1907년에 연구를 시작했다. 포우리 신부는 1912년에 나카이에게 제주도 방문을 요청해 성사되기도 했고, 나카이는 1913년에 타케 신부의 업적을 확인했다. 미국인 식물학자 윌슨은 1917년 제주를 방문해 타케 신부를 만나 구상나무 채취에 도움을 받았다. 하버드 식물원에는 윌슨이 당시 채취한 씨앗이 발아해 성장한 구상나무가 자라고 있다.

석주명 선생은 ‘석주명 수필’에 다케 신부에 대해 기록했고, 일본인 과학자들이 1928년 제주를 탐사해 ‘제주도안내’라는 책을 냈는데 타케 신부가 열정적으로 식물을 채집하는 점을 기록했다.

김찬수 소장은 “포우리 신부와 타케 신부, 나카이, 윌슨, 석주명 선생 등은 거의 동시대에 제주도에서 근대과학을 도입해 제주를 알린 사람들이다”라며 “이들의 업적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많이 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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