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허은실 산문집 <내일 쓰는 일기>(창비, 2019) 발표

책의 표지

시인이자 방송작가인 허은실이 제주에서 1년 생활을 담은 산문집 <내일 쓰는 일기>를 발표했다. 아마도 지난해 3월 1일 서울을 떠나 제주에 정착하며 보낸 1년의 기록일 게다. 이주민의 입장에서 제주에 정착하면서 겪는 긴장과 개발에 대한 아쉬움 등을 담았다.

4월 6일 썼다는 ‘모살이’라는 글이 인상적이다. 모살이는 모를 심은 지 5일 쯤 지나 뿌리가 자리를 잡는 상황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딸과 자신이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통해 그렸다.

딸 나린이는 할머니와 아빠가 보고 싶고 학교에는 가기 싫다고 울음을 터트리는데, 힘들기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이웃과 친해지기 위해 애써야 하고 학교일과 집안일을 챙겨야 했다. 딸과 서울행 비행기를 탔는데, 궂은 날씨로 비행기가 좀체 착륙을 하지 못한다. 흔들리는 비행기는 제주에 적응하는 가족의 처지와 닮았다.

그런 동요와 갈등이 있지만 제주에는 버릴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6월 6일 쓴 ‘아름다운 것들’은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큼 아름답다. 딸이 사려니숲을 찾아 오카리나를 분다. 돌아오는 길에 메밀꽃들을 위해서도 연주를 하는데 주변에 나비들이 몰려든다. 이 가족이 있어 들녘은 궁전이 된다.

섬의 독특한 문화는 이주 작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산담이 대표적이다. 묘를 집처럼 여겨 울타리를 만들었다거나 죽은 이의 혼령이 집으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산담에 ‘시문(神門)’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삶의 터에 죽음의 자리를 만든 제주의 생사관’에 깊이 매료됐다고 고백한다.

글을 읽다보면 가족의 생활터전이 성산읍 수산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최근 제주 제2공항 건설과 관련해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2월 13일 일기 ‘큰 새가 뜨면’에서 ‘큰 새’는 비행기를 뜻한다. 공항이 건설되면 오름과 동굴이 훼손되고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위로 비행기가 날아다닐 판이다. 작가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면? 끔찍하다’라며 ‘지금 여기 엄연히 살고 있는 주민들과 이 모든 생명을 외면하는, 이익에 눈먼 이들의 탐욕, 섬찟하다’고 말한다.

해녀, 제주4·3, 감귤, 굿과 잔치, 영등할망 등 제주와 관련된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기술했다. 섬의 속살을 제대로 이해하고서야 어찌 싫다거나 나쁘다고 하겠나. 2월 12일 한줄 일기에 ‘서울에 머문 지 일주일이 넘어간다. 제주가 그립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어느덧 섬사람이 됐다.

배우 문소리와의 일화도 눈길을 끈다. 과거 일 때문에 만났는데 이젠 친구이자 동지가 됐다. 중년 주부로서, 또 직업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힘겨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다. 여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제주나 서울이나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후기에 제주는 더 이상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은 낭만의 섬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내일 쓰게 될 일기에는 이 섬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근심 보다는 안도가 담겼으면 좋겠다고 희망도 남겼다.

아파트와 자동차, 경쟁으로 인한 바쁜 일상 등 삶에 지친 도시인에 다른 삶을 꿈꾸며 제주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뤘다. 다른 지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자연과 문화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개발광풍에 시달리는 제주의 현실을 폭로한다.

자연에 의지해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 바람 타는 섬이 지켜줄 수 있을 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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